[Opinion] 귀로 한 기억 [사람]

귀로 담아낸 선명한 기억들
글 입력 2019.09.2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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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기억’이라는 건 눈을 통해 전달되어 의식 속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그중 ‘귀’를 통해 전달되는 기억은 분명 큰 잔상을 남긴다. 무언가를 듣는다는 건, 그 상황과 분위기, 그 속의 나의 모습까지 귀로 기억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귀로 담아낸 기억들 중 가장 선명했던 몇 가지를 꺼내볼까.




친구의 첼로 소리



특별한 연주회는 아니었다.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열여덟 살 초가을 학교의 작은 강당이었다. 수업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대부분의 친구들이 급식을 먹으러 재빨리 강당을 나갔고 나와 서 너 명의 친구들만 강당에 앉아 못다 한 이야기들을 떠들어댔다.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각자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앉아 여유를 부리던 중, 문득 선생님께 들키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첼로를 전공하는 한 친구가 첼로를 켜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된 내 첫 번째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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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를 위한 음악이 아닌, 그저 눈속임과 귀속임을 위한 음악이었음에도 중저음의 꽤 부드러운 그 음색이 그때 그 분위기를 신비롭게 감쌌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시공간을 한계 없이 다채롭게 채울 수 있구나.’ 그 첼로 연주가 그 속의 나와 내 친구들을 아주 뚜렷하게 남아있게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지금도, 난 그때의 그 시간을 회상하며 여유를 느낀다.




드뷔시 - 달빛



♪드뷔시 달빛 듣기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다는 사명감으로 들었던 건 아니다. 그저 마음의 가라앉음을 느끼고 싶어서 들었던 음악이었다. 그때의 난 타지에서 생활 중이었고, 피아노 레스너로 활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당시 내가 가르쳤던 아이가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했고 이는 내 귀를 통해 깊은 의식 속에 닿았다.


내가 살았던 집과 그 학생의 집은 1시간 30분이 걸리는 꽤 먼 거리였다. 그래서 난 항상 버스 2층 맨 앞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때마다 흘러나오던 음악이 드뷔시의 달빛이었다. 이미 한번 뇌리에 박힌 음악이라, 단순한 나에겐 한곡 반복 재생만큼 좋은 기능은 없었다.


이상하게, 참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딱히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크게 아팠던 곳도 없는데, 정말 나 홀로 머나먼 타지에 동떨어져있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차가웠다. 아무 말도 듣기 싫었고, 시끄러운 곳에 있기는 더 싫었다. 그래서 가사가 없고 잔잔한 이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이 음악에 완전히 담겨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왕복 3시간을 내리 그 음악만 듣고, 레슨 하는 내내 학생이 연주하는 그 음악을 가르치고, 자기 전까지 그 음악만 틀어두었다. 나만의 방을 만든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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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 안에서 난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퇴근길마다 드뷔시의 달빛과 함께,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커다란 달과, 별이 가득 찬 아름다운 밤하늘을 마음껏 만끽했다. 내가 살던 곳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고요한 길을 지나. 따뜻한 분위기의 주택으로 채워진 언덕 위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면 그 장면과 그 안의 내가 다시금 나타난다.


저녁 10시 일이 모두 끝나고, 종점이었던 버스정류장에서 여유롭게 내려, 집으로 가는 별이 가득한 그 언덕을 오른다. 힘이 없어 터덜터덜 걷지만, 찬란한 달빛에 작은 희망을 느끼고 가방 속 어딘가 박혀있는 집 열쇠를 찾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 그 느낌. 귀를 통해 담았으니 보다 긴 잔상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아이들의 말



꽤 오랜 시간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해오며 무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끔 솔직하고 깨끗한 아이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순간이 마음속 깊이 박혀 한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보통 6살부터 초등학생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그 순수함에 놀라기도, 혹은 보다 성숙함에 놀라기도 한다. 어른들은 차마 하지 못하는, 혹은 굳이 하지 않는 말에 진심을 담아 귀로 흘려보낸다.


평소와 같이 몰려드는 아이들에 정신없어하며 급하게 한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레슨을 시작했다. 그 아이는 잘 웃지 않는 아이였다. 내가 아무리 친해지려고 말을 걸고 웃어 봐도 그 아이는 아주 간단한 단어로 대답만 할 뿐, 결코 웃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왜 학교 어땠냐고 안 물어봐 줘요?” 그때 머리가 띵했다. 이 아이는 나를 귀찮아했던 게 아니라, 본인만의 방식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구나.


내가 너무 바빠 항상 하던 질문을 던지지 않으니, 아이는 그게 참 서운했나 보다. 딱 그때였다. 그 시간이, 공간이 사진으로 남은 듯 멈춰버린 느낌이 들었다. 밖이 아무리 바빠도, 난 결코 그 아이의 서운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른의 방식으로 그 아이를 오해했다. 그 아이의 한마디가 귀로 넘어와 그 아이를,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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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음악으로, 때로는 말로 그 순간을 진하게 담는다. 생각해보면, 귀로 기억한다는 것, 그건 ‘향수’를 가장 풍부하게 불러올 수 있는 기억 방법이다. 그래서 난, 조금씩 아껴듣고 싶다. 그 잔상이 너무 빨리 사라져버리면, 다시는 그 느낌을 생생하게 떠올리지 못할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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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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