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이 미술을 대하는 방법 [도서]

엄정순 저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글 입력 2019.08.11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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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라는 장소가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 미술관을 들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느껴봤을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의 더움과 추움마저 느껴지지 않는 적절한 냉난방과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건축된 벽면, 숨쉬기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한 치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이 짜인 동선….이렇게 완벽하게 설계된 미술관에 사람들은 왜 ‘진입장벽’을 느끼는 것일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 장소의 편리함이 오히려 누군가를 소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불필요한 의심일까.

이러한 설계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규격화된 걸음걸이와 동작을 취하게 한다. 그러지 않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불편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휠체어 사용자는 가파른 계단으로만 연결되는 전시의 동선을 따라갈 수 없다. 청각 장애인은 오디오로만 제공되는 가이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신체적 장애로 전시를 관람하는 데 지장을 받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이들을 위한 기본적인 서비스조차 갖춰져 있지 않은 미술관이 태반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시각장애인의 관람은 전제되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미술이 시각미술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도, 시각장애와 미술의 관계는 사뭇 생소하게 느껴진다. 시각장애인의 미술을 논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보는’ 데 느끼는 불편함을 논하기 전에 ‘본다는 것’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쌓아 올려야 한다. 이들은 어떻게 그리며 어떻게 보는가. 뇌리를 스친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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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찾기 위해 시각 장애인의 미술에 대해 찾아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저자가 맹학교의 미술 교사로 일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적어 내린 수기의 형식을 하고 있다. 모두가 마땅치 않게 여긴 시각 장애인 대상 미술 수업을 다양한 형태로 추진하고, 더 나아가 교실을 벗어난 역동적인 방식의 수업과 프로젝트로 시각 장애 학생들의 미적 가능성을 발견해낸 저자의 회고록에는 내내 긍정의 확신이 가득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 이미 실존하는 가능성에 직면하는 방식을 택한 저자의 확신이 하나씩 증명될수록 시각 장애와 미술의 관계에 대한 회의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제1부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서는 저자가 맹학교에서 진행한 미술 수업에서의 경험을 기록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책의 부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이 질문으로부터 저자의 고민은 시작된다. 저자는 시각 장애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이전에 그들과 ‘본다는 것’의 의미를 공유해야 했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그 의미를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직접 갔던 장소에서 느꼈던 감각을 떠올려 지도를 그리는 수업에서 한 학생은 무수한 칸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그린다. 비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보통 장소가 가진 시각적인 이미지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그 학생은 계속해서 계단을 걸었던 그날의 육체적 피로함을 떠올린 것이다. 또한 자화상을 그리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특성을 파악하고, 풍경화를 그리는 수업에서는 그날의 날씨와 어렴풋이 보였던 빛을 더듬어 기억한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걸음으로써, 만짐으로써, 느낌으로써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특히 사진 수업에 대해 기록한 부분에서는 그들이 보는 것의 무한함에 놀라게 된다. 사진은 드로잉이나 소조처럼 신체적인 동작으로 직접 이미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다룰 수 있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자는 시각장애인이 사진을 찍고 비시각장애인이 그 사진의 내용을 읽어주는 ‘사진 읽기’를 수업에서 진행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는 세상과 외부에 실재하는 세상 간의 대화를 이루게 했다. 뒤통수가 따뜻해지는 게 기분이 좋아서 셔터를 눌렀다던 학생의 사진에는 정말로 둥근 태양과 나뭇가지가 있는 정겨운 풍경의 온기가 있었다. 시각이 아닌 감각을 시각 이미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생긴 공감각적 인상은 사진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기까지 하였다.


“제가 전맹이라서 예전에는 이미지가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자유가 떠올라요.” - 93p





코끼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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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혜광학교학생x티칭아티스트 (원작 박민경), 인천코끼리, 2009


제2부 ‘점에서 코끼리까지’에서는 코끼리와 관련된 이야기들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로 저자가 진행한 미술 프로젝트를 기록한다. 이른바, ‘코끼리 프로젝트’다. 자신의 좁은 시야만을 믿다간 거대한 진실을 놓칠 수 있다는 내용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를 모티브로 한 이 프로젝트는, 오히려 코끼리의 크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줄이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우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능동적인 형태를 취한다. 1부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했다면, 2부에서는 학생들이 프로젝트를 통해 본 것을 ‘그린 것’에 주목하여 그들의 미술에 대해 폭넓게 사유해본다.

학생들은 직접 코끼리를 만지고, 촉감을 떠올리며 코끼리 조각을 만든다. ‘동물의 사육제’의 코끼리 파트를 듣고 코끼리의 모습을 연상하여 그린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불가능할 줄만 알았던 일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성취해낸다. 시각이 아닌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실제 외형과 다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코끼리의 느낌이 십분 전해진다. 정해진 이미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개성이 빛남은 물론이다. 코끼리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세상을 만지고 듣고 온몸으로 느끼며 품에 안는 자들의 표현은 이렇게나 대단하다.


어쩌면 감각의 결핍은 감각의 회복으로 가는 우회의 길일지도 모른다. 우리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몸을 가진, 그래서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보는 방식과 관계를 맺는 것은 분명 우리의 뇌와 감각의 영역을 열어 주는 새로운 접근이다. - 204p





더욱 커다란 세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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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순 작가


책은 시종 ‘시각장애인도 미술을 할 수 있다’가 아닌 ‘시각장애인도 미술을 할 수 있는데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어 이들의 미술을 소개한다. 고작 ‘할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하기엔 이들의 미술은 비시각장애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놀랍도록 무한하고 아름답다. 저자의 표현처럼, 결핍된 감각이 다른 감각의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빛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똑같이 보고, 그릴 수 있다. 본다는 것을 단지 눈에 들어와 맺힌 상을 지각한다는 뜻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일갈하듯 그들은 감각을 민첩하게 일깨워 더욱 커다랗게 세상을 본다.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라는 질문을 작품화한 저자의 전시에서 많은 사람이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어려운 질문이다. 누군가가 다수의 사람과 다르게 본다는 이유로 본다는 사실마저 부정당하는 곳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이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책에서 만난 학생들과 함께 ‘본다는 것’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나갈수록 세상을 보는, 그리고 나를 보는 시야 또한 넓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보이냐는 질문에 모두가 쉽게 대답할 순 없더라도 모두의 대답이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을 수 있는 다정한 세상을 바란다. 세상은 더욱 커지고, 찬란하게 그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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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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