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질척이고 축축하게 - 수수께끼 변주곡 [도서]

누구에게나 뜨거운 욕구와 드러내지 못하는 결핍이 있다.
글 입력 2019.08.05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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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손님>의 저자 안드레 애치먼. 그는 201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수수께끼 변주곡>을 통해 다섯 개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첫사랑>, <봄날의 열병>, <만프레드>, <별의 사랑>, <애빙던광장>으로 구성된 책은 각각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문체로 전달한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원작 <그해, 여름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도 보지 않아 작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제로였다. 단지 영화의 장르가 퀴어라는 말을 주워들은 정도였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수록 당혹스러웠다.
  
<첫사랑>의 미성숙한 소년 폴은 가구를 만드는 난니에게 빠졌다. 하지만 그가 난니에게 지닌 감정은 소년의 첫사랑이라기엔 노골적인 욕망이 그득하다. 흔히 가슴 뜨거운 첫사랑이라 함은 순수하고 천진한 것이 아니던가. 동화 같은 이상을 산산조각 낸 적나라한 욕구와 상상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너무 날 것이라 낯설었던 글자들 사이로 빠져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적당히 선정적인 단어들 사이로 폴의 청량한 떨림까지 느껴지는 건 순전히 작가의 '조절' 덕분이었다. 그 덕에 난 어느 순간 폴이 되어 열띤 호흡을 따르며 줄타기를 하는 듯한 위태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소설이 쭉 진행되나 싶었지만 두 번째 장에선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봄날의 열병>의 주인공은 연인의 바람을 목격하고 배신감을 느끼지만, 질투하진 않는다. 그는 사랑을 대변하는 열렬한 감정을 제 연인에게서 찾지 못하고 미적지근한 분노만을 느낄 뿐이다.

새로운 사랑에 빠진 연인을 보면서도 질투하지 않던 그는 테니스 코트에서 만난 만프레드의 눈길 한 번에 활화산처럼 불타오른다. 그 타오름은 앞서 <첫사랑>의 폴의 불꽃관 달리 질척이고 축축하다. 성인 남성의 순수하지 않은 욕망에 상응하는 플러팅도 꽤 대담하다. 폴의 순수한 온도와 상반되는 뜨뜻미지근한 질척임이 내가 느낀 <봄날의 열병>이다.

그의 뜨거운 욕망은 <만프레드>로 이어진다. 그는 새 남자가 생긴 제 여자친구는 어느새 안중에도 없고 테니스장의 남자, 만프레드에게 점점 더 사로잡힌다. 그의 눈은 자석에 끌리듯 만프레드에게로 향하고 그의 행동 하나, 눈빛 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선다. 젖은 바지를 꿰입은 듯 척척한 문장 간의 습도가 점차 높아져 간다. 뜨겁고 거센 용암이 애매하게 뜨거웠던 그에게 은밀히 숨어들어 온도를 높인다.

각 단원을 넘길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문체가 흥미롭다. 성장기 소년의 풋내나는 마음을 순수하게 서술하다가도 사회에 찌든 성인 남성의 애매한 분노를 치기 어리지 않게 구사한다. 적당히 유치하고 교묘하다. 그러다 그가 만프레드에게 갖는 축축한 욕망은 의뭉스럽고 스산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마냥 음습하게 여기기엔 그 속엔 묘한 애틋함과 낭만이 존재한다. 단지 존댓말로 바뀐 문체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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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 소설의 분위기를 단정할 수 없다. 조금 익숙해질만 하면 금세 모양을 바꾸어버린다. 하지만 그 속 알맹이가 완전히 다른 인물로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무언의 일관성이 있다. 얼굴에 손을 대지 않고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는 중국의 전통극처럼 한 인물이 여러 인격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뒷장으로 갈수록 화자를 유추하기가 어려웠을까. 종국엔 누구인지를 가르는 것이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그저 읽기로 했다. 사람이 사랑을 갈망하는 뚜렷한 이유도, 원인도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따지지 않기로 했다.

<수수께끼 변주곡>이란 제목은 에드워드 엘가의 관현악 변주곡을 떠올리게 한다. 그 곡은 엘가가 주변 인물들을 바탕으로 한 즉흥 변주곡으로, 그의 대표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수수께끼 변주곡>에는 두가지 성격이 존재한다. 영국 신사의 고집스러운 자신감과 불안정하고 감상적이며 내향적인 이방인이 동시에. 이 반대되는 성격이 엘가의 이중적인 모습을 반영한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 점을 저자는 주목했을 것이다.

흔히들 인간은 입체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한 인간에게는 모순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엘가의 음악에서 시시각각 변모하는 멜로디와 상충하는 면처럼 수수께끼 변주곡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한 동경 너머로 숨은 강렬한 욕구가 그러하고, 가진 것에 대한 실증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눈 깜짝할 새에 모양새를 바꾸지만, 어딘가 한결같다.

누구에게나 뜨거운 욕구와 드러내지 못하는 결핍이 있다. 전혀 유추할 수 없는 모양으로 나타나다 지휘자의 지휘봉 끝에서 바뀌는 변주곡처럼 시시각각 형태를 달리한다. 특히 그것이 가장 솔직한 '욕구'라면 그것을 위한 가면이 다양한 종류로 준비되어 있다. 너무 새빨게 적나라한 것도 있고 습기를 머금어 눅눅한 시멘트 바닥처럼 회색빛을 띨 수도 있다. 가면들이 얼마나 다양하든지, 결론은 언제나 하나로 도출된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눈이 너무 맑았다.
그 눈을 만지고 싶은 건지,
그 안에서 헤엄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 p.25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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