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통에 대한 감수성 - 레라미 프로젝트 [공연]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얼마든지 예민해져도 좋다.
글 입력 2019.07.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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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라미 프로젝트>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 라디오 잡음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여보니 한 아나운서가 빠른 호흡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점차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여러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앞으로 관객들 앞에 펼쳐질 사건을 암시했다. 그렇게 엄습해오는 혼란 속에서 연극 <레라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윽고 무대로 등장한 극단 단원들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서로를 소개한 뒤 자연스럽게 프로젝트의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 연극이 시작된 줄은 몰랐다. 실제 배우로 존재하는 건지, 극단 단원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건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관객들을 ‘레라미’라는 극적 공간으로 데려간 건 인터뷰를 재현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레라미 주민들의 증언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면서 작품과 관객이 만나는 지점에 하나의 세계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한편, 연극 <레라미 프로젝트>는 7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토록 많은 인물을 8명의 배우가 온전히 소화해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삑-"하고 신호음이 울릴 때 조명이 바뀌는 동시에 배우는 역할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얼마 후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가진 역할로 등장하게 된다. 가령 한 배우는 극단 단원을 연기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동네 아주머니로 등장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70여 명의 인물이 명확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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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 되는 말, 말, 말

 
연극을 관람하고 나서 머릿속에 유난히 ‘말’이 맴돌았다. 관객들은 작품의 특성상 등장인물들의 증언에 의존하여 매튜 셰퍼드를 둘러싼 사건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사건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생각이 담긴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녹아 있는 차별과 폭력이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은 “욕설과 비하 표현을 사용하여 강한 혐오를 표현하거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춘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고, 친밀한 언어를 사용하여 성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방식”으로 극과 극의 어휘를 사용해 자신의 관점을 드러냈다.

다음으로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로저 슈미트 가톨릭 신부의 대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들이 호모나 레즈나 그리고 또… 다이크, 그래 다이크, 그런 식으로 불릴 때, 그건 폭력이야. 그건 폭력이 잉태된 거야.”

- 연극 <레라미 프로젝트> 中


이처럼 성소수자들을 향한 편견과 증오를 담고 있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 자체로도 물리적인 폭력을 잉태할 수 있다. 언어는 사고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렇기에 타인에 대한 혐오는 무의식적으로 말에 스며든다. 말 한마디가 칼끝이 되어 돌아가는 건 한순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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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감수성


어떤 부모가 자식을 앗아간 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매튜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극이 절정을 향해 달려갈 때, 마지막 선고를 앞두고 그들의 사형을 반대했다. 살아서 매일 매튜를 기억하길 바란다는 말을 끝으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연극 <레라미 프로젝트>는 마지막까지 사건에 대해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끝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판단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이렇게 한 세상을 잃은 개인의 고통은 세상 앞에서 무색해진다. 언론은 누군가의 죽음을 수치화해서 보도한다. 그 앞에서 문자 그대로 숫자는 숫자일 뿐이라는 듯이 행동한다. 개별적으로 고통에 응답을 받는 일도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일까. 세상 사람들은 점점 무감각해진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94쪽.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얼마든지 예민해져도 좋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과 감수성이 필요하다. 감수성은 타고나는 기질이 아니기 때문에 연습을 통해 기를 수 있다. 점점 둔해지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참고 자료: 박소영(2018), 『레라미 프로젝트(The Laramie Project)』의 성소수자 지칭어 번역, 한국통역번역학회, 20(1),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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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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