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삶은 잠에 싸여있을 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글 입력 2019.06.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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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든 것은 존재하고, 변화하는가? 그 원인은 무엇일까?


경이로운 세계에 던져진 형이상학적 동물인 인간은 모두 같은 물음에 마주하고, 그에 대한 답을 탐구한다. 삶이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학문도 삶을 이해하는 과정 중 하나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근대의 신학적 세계관과 이성주의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하면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감동적인 저서를 발표하며 역사 속에서 등장했다. 자신의 이름이 먼 후대에도 전해질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예언대로 그의 철학은 수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면서 살아남아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있다. 최근에 을유문화사에서 더 세련된 번역으로 출판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필자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이번에 출판된 책의 장점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자면, 구성이 좋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서문들을 배치하고 칸트에 대한 비판을 부록으로 붙였을 뿐만 아니라, 크게 두개로 나뉘어지는 해제의 내용도 충실했다. 개인적으로는 주석의 충실함이 좋았다. 이런 소소한 것들이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정신적 여정을 맛보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의 유쾌하고 날카로운 문단 사이에서 수많은 심리학자의 얼굴을 다시 곱씹을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역시 정신분석학자들이다. 쇼펜하우어는 무의식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의지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무의식을 암시하였다. 그 무의식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론으로 사용한 프로이트는 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의 문을 연 선구자인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숨겨진 제자다.

자신의 저서를 최소한 두번 읽길 바란다는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잠시 덮어두고, 첫번째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쇼펜하우어만큼 오해를 사고 있는 철학자가 없다는 것이다.책을 모두 읽고나면 고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사라지고,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지만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한 구원에 대해 성찰했던 쇼펜하우어가 남는다. 쇼펜하우어가 오만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글을 읽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겁도 없이 기존 철학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그는 그가 사랑해마다하지 않던 칸트에 대한 '섬멸전'을 예고하기도 했다), 치열한 연구과정이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보다 긍정적이라고 자부하는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팬을 자처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고 자살한 유럽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필자는 감히 그 청년들이 쇼펜하우어를 왜곡했다고 말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마지막에 이르고자 했던 것은 끝없이 연속되는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는 결코 삶을 추상적인 아름다움에 머물게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학문으로 삶의 본질에 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학문이 더이상 답할 수 없는 지점부터 형이상학이 시작된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삶은 짧지만, 진리는 영원하다. 그러니 우리, 이제 진리를 이야기하자. 이것이 오늘날에도 길고 긴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글을 읽는 독자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이 조잡한 글을 공개하는 아쉬운 마음에 몇가지 첨언할 것이 있다. 본 서평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글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가 쇼펜하우어의 저서에서 만난 것은 단순히 몇페이지의 글로 요약하기 어려운 형태의 것이다. 여기에서도 쇼펜하우어의 서문을 빌려오고 싶다. 쇼펜하우어는 네 권에 하나의 부록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책들은 모두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건축물의 기둥처럼 한가지가 빠져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말대로, 가장 인상깊었던 점만을 뽑아 쓴 이 서평은 쇼펜하우어의 메시지를 모두 전달하기에는 조잡하기 그지없다. 필자가 지면상 과감하게 삭제한 부분으로, 미학과 윤리학에 대한 부분이 있다. 필자 역시도 받은 인상을 모두 적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조건에 통탄을 금치 못한다. 만약 이 서평을 통해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궁금하다면 꼭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읽기로 결심했다면, 역시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빌려와 -요약된 것일지라도 알고있지 않다면- 칸트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도저히 방향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요구하는 것이 많게 느껴지지만, 결과까지 가지 않더라도 과정에서 얻는 보상은 두둑하다. 또 개인적으로 불교 서적을 읽으면 쇼펜하우어 철학이 더 익숙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쇼펜하우어의 책이 주는 가장 가치있는 점은, 책을 덮고 나서 더 읽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이 위대한 여정에 잠깐 발을 담근 필자도 우파니샤드와 불교철학을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쇼펜하우어의 문체는 복잡하지 않고 위트로 가득차있으니, 필자와 같은 철학 비전공자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빠져드는 경험을 공유하길 바라며, 조잡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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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중 한장면
윌리엄 호가스, 1736년경




1. 충분근거율의 원리를 통해 전통적 인과개념을 깨부순 지적 혁명가, 쇼펜하우어 - 벗이여, 유년기에 벗어나, 깨어나라!


데카르트는 서양철학의 인식론의 근간이 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주창했다. 그는 우리가 가진 지식이 허구이거나 왜곡된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가 의심한다면, 최소한 사고하는 그 존재는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자각하는 인간은 생각하고, 생각하는 개체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주관을 넘어서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가 다다른 결론은 감각적 경험이 아닌 선험적으로 주어진 이성관념에 따라 실체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세상을 나눴고, 이 두 조합으로 세상을 구분하려 했다. 데카르트는 수학과 철학을 탐구하는 순수한 지성을 상상과 감각작용과 독립시켜 사유하는 것을 본성으로 보았다. 순수한 정신과 독립되는 감각은 정신을 속여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 그는 정신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으로 나눴다. 그리고 이 구분을 나누는 곳에 신이 존재한다. 이와 비슷하게 근대의 신학적 세계관의 대표자로 라이프니츠가 거론된다. 라이프니츠는 충분근거율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그는 우주가 근거와 이유들로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근거율로는 사물의 본질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근거율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기원인을 가진 필연적 존재로서의 신을 제안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했다.

쇼펜하우어는 이전의 철학자에게서 논의된 근거율의 문제를 그의 박사논문인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를 통해 비판했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이 모든 학문이 원인에 대한 앎을 가져야 하며,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다양한 결과들이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을 언급하며 근거율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앎과 증명을 구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즉, 원인의 인식과 인식의 근거가 구분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세계는 우리에게 표상으로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의 이해가 선행하여야 한다.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실재론과 달리 현상과 사물자체를 구별하였다. 즉, 우리의 의식의 내용인 표상이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현상으로 규정한다. 쇼펜하우어는 사물과 현상을 구별한 것을 칸트의 가장 큰 공적으로 평가하며 사물과 인간 사이에 있는 지성이 매개함과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수용하였다. 사실 이 점은 오늘날 인지심리학에서 수많은 실험과 이론을 통해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에서 정보처리 과정은 표상적 (representational) 이다. 세상의 대상들 자체를 조작하거나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상징으로 표상화하여 정보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어떤 표상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는 내적표상, 즉 상징구조에 정보처리적 조작 (연산) 을 가하여 인간이나 컴퓨터라는 체계가 의미 있는 행동 또는 출력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파란색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어적인 합의가 있을 뿐 다른 표상을 받아들여 그것을 파란색이라고 생각하며 산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가 다루는 표상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주관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표상들은 선험적으로 규정가능한 결합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연관성이 충분근거율, 혹은 근거율이다. 이 근거율은 모든 학문의 어머니이자 토대가 된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적인 것, 개별적인 것이나 분리된 것은 결코 우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데카르트에게 이어지는데, 그는 데카르트가 인과개념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데카르트 역시 모든 것에 원인이 있음을 인정했으나, 유한한 인간과는 대비되는 신이 무한성을 갖기 때문에 그 스스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존재론적 증명은 단순한 분석판단을 매개로 얻어진 논리적 진리에 의존할 뿐이며, 인식근거를 주어진 개념 속에서찾고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자기원인은 영원한 인과의 사슬을 끊을 수 있지만, 쇼펜하우어 입장에서는 엄격한 인과법칙의 요구, 즉 요청된 원인을 인식근거로 대체함으로서 해결했다. 라이프니츠 역시 같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으며, 그렇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인식과 학문을 정형화 시켰다고 평가했다.

쇼펜하우어는 인식근거와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던 사람들이 근거율을 영원한 진리로 생각하였으며 세계에 사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는 근거율이 세계의 탐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시간, 공간, 인과성이라는 형식에 묶인 근거율로는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우리의 모든 표상은 주관의 객관이며, 표상이 성립하려면 항상 인식하는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야 한다. 하지만 표상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선천적인 형식에 의해 결합된다. 표상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학문의 대상이다. 하지만 학문은 이유와 근거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학문의 설명은 두가지 표상이 속하는 부문을 지배하고 있는 근거율의 형태의 관계 상호간의 두가지 표상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2+2가 어째서 4인지 더이상 묻지 않고, 삼각형의 각이 같으면 어째서 변이 같은지 묻지 않으며, 어째서 주어진 원인에 따라 그 결과가 일어나는지 묻지 않고, 전제가 참이면 어째서 결론도 참인지 묻지 않는다.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궁극적인 지점에서 우리는 숨겨진 성질을 가정하며 거기에 머물 뿐이다. 여기서 모든 설명의 원리인 충분근거율의 근거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떤 사물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 사물에 주어진 존재나 근거율의 한 형태, 즉 그에 따라 존재가 그것이 있는 바대로 있어야 하는 형태로 소급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근거율이 어떤 한 형태 안에서 표현하는 관계는 더이상 설명될 수 없다. 마치 눈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역시 인지심리학의 입장과 일치한다. 정보처리 과정은 정형적으로 기술될 수 있으며, 표상되는 정보의 상징적 구조들이 지니는 내용, 즉 의미는 그 상징구조의 통사체계에 의해 규정된다. 쇼펜하우어는 네가지 원리를 제안했으며, 오늘날 심리학에서는 다양한 시지각 담당영역의 뇌와 작업기억의 존재로 설명한다. 뭐가되었건 알고리즘이란 본질적으로 형식적 절차에 의해 규정되기에 정보처리 과정은 형식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

이렇듯 독자적인 세계관을 주장한 쇼펜하우어의 행보는 헤겔과의 대립관계에서도 두드러진다. 헤겔과 쇼펜하우어의 갈등 에피소드는 오늘날에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비판한 존재론적 증명과 우주론적 증명을 헤겔이 다시 확장했다고 비판했다. 헤겔이 직접적으로 직관하는 이성을 통해 절대자를 최초원인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최초원인으로서의 신을 설정하는 우주론적 증명이 논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이 직접적으로 직관하는 이성을 통해 절대자를 최초원인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라이프니츠와 헤겔로 대표되는 이성주의 형이상학의 신존재 증명을 허구로 비판한다. 비판적 합리주의 주창자 포퍼는 헤겔철학의 목표를 당시 프로이센 국가 목적에 봉사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헤겔철학이 국가철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 통치와 종교의 교리를 정당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는 강당 철학자들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를 옹호한다고 비판하였다. 헤겔은 동양이 자유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지 않는 죽은 사회라 부르며 유럽중심주의에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 철학자로도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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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장 레옹 제롬, 1860



2. 맹목적인 삶의 욕구로부터의 자유,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희구 - 인식이 생기자마자 욕망은 사라져버렸다

표상은 내적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 쇼펜하우어는 원인학적인 설명이 한계에 다다르는 곳에 비로소 형이상학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표상 인식의 한계와 새로운 세계의 파악 방법을 성의 비유를 들었다. 성문 밖에서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비밀통로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즉, 외부 대상의 인식, 표상의 방법으로는 사물의 내적 본질에 도달 할 수 없고, 사물의 내부를 통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의 비밀통로로 들어가는 방법을 신체를 통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체는 오성적인 직관 속의 표상과 객관들 중의 객관으로 주어진다. 예를 들어 배가 아프다면 우리는 배가 아프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안다. 이는 신체가 의지로서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의사가 배가 아픈 환자를 진찰할 때, 의사의 주관의 표상으로서 아픔은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신체가 표상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심장은 위기에 몰릴 때 세차게 뛰곤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사실을 통해 모든 신체의 운동이 의지행위가 가시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체는 욕망과 완전히 상응해 움직이며, 욕망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각 현상은 원인학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 내적 본질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신체의 운동을 의지의 객관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사물 자체인 의지가 직접 객관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지야말로, 칸트가 말한 사물 자체이다.

중요한 것은 표상과 의지가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하나이며, 인식론적인 의미에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의지가 객관화 된 것이 표상이고, 의지는 표상의 양태다. 이처럼 의지의 현상은 근거율에 종속되어있지만, 사물자체로서의 의지는 근거율, 즉 다수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한 개체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의지의 현상이다. 개체는 의지의 현상으로서, 근거율인 필연성의 법칙에 따른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 무기계의 물질은 원인에 따라, 식물은 자극에 따라, 동물과 인간의 행위는 동기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그 내적본질은 배일에 쌓여있으며, 인간의 경우 성격은 숨겨진 성질로서 남는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힘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중력과 같은 힘은 원인과 결과가 지배하는 영역으로, 원인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이 차이를 알기 쉽게 예로 들어보자면, 돌이 떨어지는 원인을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원인에 대한 결과의 기술일 뿐, 중력의 본질인 근원적 자연력에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행위와 삶 모두가 근거율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인간의 성격은 예지적 성격과 경험적 성격으로 나뉘는데, 경험적 성격은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예지적 성격은 설명될 수 없으며 근거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예지적 성격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근거율의 원리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의 목적과 근거는 물을 수 없다. 의지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현상에만 효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식된다는 것 자체가 즉자성에 모순되며 인식된 모든 것들은 그자체로서의 현상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객관화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가장 낮은 단계의 의지는 중력, 전자기력과 같은 자연의 근본적인 힘이다. 의지의 객관화의 높은 단계는 낮은 단계를 제압하면서 나타난다. 의지가 높은 단계로 올라가면서 인간은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는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어떤 맹목적인 충동으로 나타나는데, 식물들과 달리 동물부터는 개체를 유지하고 종속을 번식시키기 위한 인식능력이 생겨난다. 동물부터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어 미래와 과거를 개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반대로 그만큼 오류와 착각의 가능성도 생겨난다. 의지의 현상인 기본적으로 물질들은 그저 끊임없이 투쟁한다. 왜냐하면 모든 의지의 현상들은 상호간의 투쟁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갖게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맹목적인 의지의 현상으로서 계속되는 생존 투쟁의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식물을 먹거나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동물과 식물을 죽이며 인간은 살아가며, 인간은 인간을 제압하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이 잔인한 굴레가 반복되는 이유는 삶의 의지가 객관화되었기 때문이다. 삶에의 맹목적 의지는 언제나 허기졌기에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며 살아간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맹목적 의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성, 끝없는 흐름이 의지의 본질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식이 의지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식은 의지에 봉사하고 의지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식 주관을 실체가 아니라 상태로 규정하였다. 맹목적 의지의 노예인 인간은 끊임없이 의욕하면서 최종적인 만족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개별적인 행위에는 목적이 있지만, 전체 의욕에는 목적이 없다. 막대한 부, 열정적 사랑과 같이 당장 생기는 노력과 소망은 달성되자마자 또다른 형태로 떠오른다.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으며, 끊임없는 맹목적 의지에 휘둘리는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고통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라면 떠올렸듯이, 이는 불교적 메시지와 상통한다. 불교에서는 탐진치를 떨쳐버리고 개개인이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탐진치에서 ‘탐’이란 탐욕, ‘진’이란 성냄, ‘치’란 사리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부처는 탐진치가 삶과 죽음을 포함해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봤다. 부처는 탐진치에서 벗어난 상태를 열반과 해탈로 표현했다. 부처는 인간의 탐냄과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열반이라고 했다. 이기심이 녹아 없어지면서 참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의 감각적 차원을 뛰어넘어 더없는 행복과 희열이 찾아온 상태, 너와 나가 구별없이 하나인 전체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후에 불교를 접한 쇼펜하우어가 스스로를 불교주의자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쇼펜하우어도 고뇌의 형태를 바꾸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다. 하지만 불교는 초월계에 대한 낙관성을 약속한데 비해, 쇼펜하우어는 충분근거율을 따르지 않는 또다른 세계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행복은 어느 형태로건 불가능한 거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모든 결핍이 충족되었음을 말하는데, 모든 행복의 선행조건인 결핍이 충족되면 즐거움도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자유와 도덕에 대해서 논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다수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체화의 원리에 속고있는 것으로 이야기 했다. 현상에서만 다수성이 가능하고, 사물 자체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모든 존재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결국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 모두 같은 본질을 가진 하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동정심이 탄생한다. 쇼펜하우어는 개체화의 원리의 간파가 사랑의 근원이며, 순수한 사랑을 동정이라 이야기 했다. 동정이 아닌 사랑은 이기심이다. 이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전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어떤 고통도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비로소 완전한 무의지의 상태, 성스러움에 이른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부정하고 난 뒤에 무가 남는다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무는 결코 존재의 반댓말이 아니다. 이는 모든 욕망이 소멸한 상태를 말한 것으로,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 지점이다. 자신의 의지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지만, 끊임없는 고통으로부터 구원한다. 이를 통해 철학, 예술, 윤리가 가능하게 된다. 현대인에게 쇼펜하우어가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결국 공허하며, 엄격한 의미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을유문화사 출판, 홍성광 옮김

2019년 5월 25일 발행

760쪽

27000원

ISBN 978-89-324-4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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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에 사용된 그림들은 모두
을유문화사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가져왔다.

참고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 연구, 김현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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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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