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스러운 고통, 고통스러운 사랑으로 남은 연인에 대하여 [도서]

글 입력 2019.06.1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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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 문학의 대표적 여성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공쿠르 상 수상작


베트남에서의 가난한 어린 시절과 중국인 남자와의 광기어린 사랑


그 아련한 이미지들을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로 되살려 낸 자전적 소설



민음사에서는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연인』이라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이 소설이 단지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받은,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존재들 간의 사랑을 그려낸 평범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출간된 당시에 본 소설은 프랑스의 문단과 언론에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논란의 작품이기도 하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특유의 문체가 매력적으로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지 독특한 문학적인 수사와 권위 있는 사람들의 극찬으로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선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전’으로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작품들은 하나의 장점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한 단면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진가를 담고 있어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빛이 나는 작품이야 말로 오늘날까지 남아 ‘고전’의 자리에 오른다. 형식적인 문체와 표현의 영역을 떠나, 이 고전문학작품의 아름다운 스토리, 그리고 그로써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울림, 그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 본 Opinion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으나,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감동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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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인물들이 그리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15살의 가난하고 불운한 프랑스 소녀(이하 주인공 ‘나’),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끌려다니며 살아온 겁쟁이 중국 남자. 이 둘은 12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둘 모두 암울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둘의 사랑은 각자에게 결국 좌절을 가져다준다.


‘나’의 가족은 아버지의 발령에 의해 프랑스를 떠나 베트남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나, ‘나’가 어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어머니는 발작과 신경증에 시달리며 주위에 폭언을 일삼고 다닌다. 어머니는 큰오빠만을 편애하지만, 큰오빠는 마약과 도박에 가산을 탕진하며 도둑질을 일삼고 ‘나’와 작은오빠는 핍박에 시달리며 상처받는다. 겁쟁이 중국 남자는 베트남의 부동산 백만장자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로 유학을 떠나지만, 타지의 삶에서 권태에 빠지고 결국 이룬 것 하나 없이 베트남에 들어와 방탕한 삶을 산다. 상처 받은 이 둘이 우연히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펼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서사를 추동하는 힘은 고통과 죽음이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상처 입은 존재들, 사회로부터 낙오된 사람들이고, 결국 괴로움 속에 침잠해 그 누구도 의지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큰오빠는 작은 오빠를 때리며 협박하고, 작은오빠는 큰오빠를 외면하고, 어머니는 큰오빠를 편해하지만 큰오빠는 가족들의 돈을 훔쳐 도박과 마약에 가산을 탕진한다. 이런 사정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범죄의 온상지로 전락해버린 가정에 증오를 품고 살아간다. ‘나’의 연인인 중국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는 베트남에서 부동산으로 크게 성공하지만 아들에게 정을 주지 못하고, 아들은 가정의 온기 없이 타지를 떠돌다가 외롭고 공허한 영혼이 돼버려 베트남으로 돌아와서도 매일 밤 일회적인 육체적 교류들 속에서 의미없이 살아간다.


정체된 이들의 일상은 사랑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더 이상 기숙사로 복귀하지 않는다. ‘나’의 연인은 ‘나’가 다니는 여학교 앞으로 검은 리무진을 몰고 온다. ‘나’는 차를 타고 중국인 거리에 있는 허름한 독신자 아파트로 간다. 그는 ‘나’를 씻겨주고, ‘나’는 그의 아기가 된다.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이 광적인 사랑은 매일같이 반복된다. 물론 본래의 고통스러운 일상은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가혹해진다. 매일 낯선 리무진에 탑승하는 15살의 ‘나’에 대해 여학교에서는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어머니는 ‘나’를 더욱 심하게 때리고 신랄하게 욕한다. ‘나’의 가족들은 ‘나’의 연인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연인의 아버지도 이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둘만이 함께하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고 서로에게 마음을 의지하게 된다. 상념에 젖은 한 사람이 울 때, 또 한 사람이 옆에서 같이 울어줄 수 있고, 그러다 둘의 울음이 그치고 나면 서로 눈을 맞추며 미소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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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둘의 관계는 튼튼하고 건설적인 사랑의 모습과 거리가 많이 멀고,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기 힘들다.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관에서는 이들이 그리는 현상 자체는 광적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도가 없다. 삶을 내팽개치고 밀폐된 공간에서만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사랑 행위는 오히려 각자를 더욱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변생활은 심각해져만 가는데 둘이서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우는 것밖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의미가 있는 것은, 둘의 사랑이 각자에게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점에서이다. 둘은 천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아픔을 스스로 발화하면서, 둘은 비로소 울 수 있게 된다. 눈물은 응축된 감정이다. 흘리지 않고선 비로소 해소될 수 없는 것인데, 열악한 나날들만이 반복되면서 눈물을 흘릴만한 환경도 여력도 없었을 터이다.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눈물을 기꺼이 보여주고 이로써 각자의 상처를 씻을 수 있게 된다. 상처의 극복은 용기로도 이어진다. 강경한 아버지는 결코 이길 순 없지만, 겁쟁이 남자는 피하기만 하던 아버지를 당당히 맞서며 제발 그녀를 허락해 달라고 애원할 용기를 얻기까지 이른다.


아름다운 남녀와 그들을 둘러싼 세계 사이의 갈등은 작품의 말미에서도 결국 해결되지 않는다. 둘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서로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탈출구 없는 혹독한 세상 속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 “사랑”으로써 삶을 헤쳐 나가는 1년 반 동안의 시간은 추억으로 영원히 남는다. 단순한 수사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 영원히 남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사람은 세상에 비해 너무 초라하기만 한 스스로를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환상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둘의 이별은 가혹한 생활로의 복귀인 동시에 새로운 의지로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계기 역시 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세계와 사랑의 극적인 대립은 사실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세상은 너무 크고 나는 작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세상과 같은 수평선에 두고 계속 비교하다가 지속되는 마름질에 자아는 마모되어 피로해지고, 소설에서처럼 태생적인 고통을 타고날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그 고통스런 대조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작품 속에서 ‘나’가 그의 아기가 되었듯이 우리도 누군가에게 또 다른 존재가 되어주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의미와 가치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비로소 커다란 세계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존재들이지만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이다.


문학의 힘은 (물론 모든 예술의 가치가 이 지점에서 발생하지만) 딱딱한 설명문이 전달할 수 없는 감정적인 설득력을 지녔다는 부분에서 발생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사정이 있는 한 살인마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문학이라는 ‘언어 예술’로 가공되면서 독자들이 살인마의 처지에 슬퍼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소개하는 『연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플롯은 단지 불운한 가정환경을 타고난 두 사람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 특유의 문학성과 만나면서 이 이야기는 훌륭한 서사가 된다.

 

출간 당시 수많은 비평가들의 찬사와 비난이 발생한 부분 역시 뒤라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다. 작품의 서술 순서가 완전히 뒤죽박죽이고 일관성이 없는데다, 이야기에 뜬금없는 기억이나 풍경 등의 일회성 장면들이 수시로 삽입되어 어지럽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어지러운 서술 방식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는 상당히 몰입감 있게 잘 읽힌다. 상처 받고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심지어는 정신분열증적인 증상을 보이는 인물들 간의 이야기 속에서 뒤라스의 서술 방식은 독자 역시 정신분열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특징이 독자에게 있어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게 한다. 고통스러운 매 장면에 문학적인 서사를 입혀 우리 감정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것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해낸 일이고, 이 지점에서 고통과 죽음이 거미줄처럼 엮어져 있는 이 작품의 가치가 발휘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상대에게 위안이 돼줄 수 있다. 물론 모두들 사랑 혹은 사람에 대한 수많은 경험이 있겠지만, 어느덧 사람을 대상화하여 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포기하며 사랑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의 방식을 함부로 구획하여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예술 텍스트를 통해,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빠져보고, 또 지금 스스로 어디쯤에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이 단순한 오피니언 텍스트는 담아내지 못하는 무한한 감동을 반드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독자들이 반드시 이 책을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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