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OTEA] DEATH 13: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글 입력 2019.04.2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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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OTEA] DEATH 13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인간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의 삶 속에서 홀로 태어난 존재에서 더 커다란 존재가 되어간다. 이처럼 한 삶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의 영역과 달리 반드시 오는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건, 어떤 가능성을 실현해왔건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죽는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은폐되고 낯설어지기 쉽다. 생존을 위한 안전한 공간과 기술의 발달로 풍족해진 먹거리는 끔찍한 사고현장이나 죽음을 스낵처럼 즐길 수 있게 했다.


최첨단 의료기기와 의료기술을 가진 병원과 그 비용을 부담해주는 보험회사가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고, 이로 인해 죽음을 하나의 실존적 유한성이라기보다 우연적 사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죽음을 실존적 유한성으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꽃이 시들고, 행성이 떨어져나가고, 벌레가 다른 벌레의 먹이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지연시킬지언정 모두 해체의 운명을 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카드는 앞서 언급한 죽음에 관한 것이다. 바로 전 카드가 '고행'을 의미했는데, 그 다음에 죽음이 오는 것은 참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 시점에서 바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여정과 평정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바보밖에 없을 것이다. 타로카드에서 상징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방식, 영원을 맹세한 관계, 친숙하기 때문에 안정감을 느꼈던 주변환경들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처럼 정지되고, 해체되고, 종결된다. 혼과 백이 나뉜다는 표현 처럼 죽음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본 연재물에서는 죽음을 말 그대로 '죽음'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 이유는 첫번째로, 죽음이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공포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통과 불안이 죽음 앞에서는 섞이거나 작아진다. 그 총체적인 공포로써 죽음을 다루는 것이 우리의 사유를 더 즐겁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로, 우리의 삶이 죽음을 받아들일 때 좀 더 풍요로워진다고 주장한 얄롬과 카드의 메시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명은 이정도로 하고 본격적인 카드 분석에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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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Evangelion


기사는 얼굴 근육이 없어 표정을 짓지 못하는 해골이다. 그는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중립적인 존재다. 단단한 갑옷과 흰 말을 탄 기사는 앞에 배치된 인간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나타낸다. 갑옷은 검은색이다. 검은색은 모든 색 중에서 가장 강한 성격을 가진 색으로, 강한 침범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검은색의 특색은 '가장 우아하고 고귀한 마법의 색'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르누아르는 검정을 '색의 여왕'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검정이 주는 역동적이며 날카롭고 강력한 파워를 암시한다. 그런가 하면, 검정색은 우리가 익숙한대로 죽음과 부정, 침묵과 슬픔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가 타고 있는 흰 말도 기사의 기묘함과 강력함을 빼다 박은 눈빛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흰말을 탄 기사'의 모습이다. 이육사 시인이 그렇듯, 백마를 타고오는 자는 초인을 상징한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간달프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도 빛나는 백마를 타고오지 않았는가? 흰 색은 일바적으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을 나타낸다. 성경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흰 말을 탄 이를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그 뒤를 붉은 말을 탄자, 검은 말을 탄자, 청황색 말을 탄 자 들이 따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노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 외에도 복음 운동이나 실제 역사적 견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무엇이 되었건 이육사가 말했듯이 인간을 초월한 '초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에게 선 악의 고리를 씌우는 것도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우주의 모든 것들이 생성되고 해체된다. 우리의 우주를 발생시킨 원리 조차도 해체를 동반하고 있었다.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시바 신도 파괴하는 동시에 창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우주의 원리 그자체, 인간으로서는 신인 동시에 중립적인 존재인 셈이다.

말과 기사의 흑백의 대비와 마찬가지로 깃발에도 검은 바탕에 흰 장미 꽃이 그려져 있다. 이는 죽음의 고통을 통과한 후 약속된 부활, 재생, 갱생을 의미한다. 죽음 후에 새로 태어난 존재가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순결한 것처럼, 흰 장미는 밝기와 순결을 의미한다. 백마의 발굽 아래에는 한 노인이 쓰러져 있다. 4번 카드의 교황이 기억나는가?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권력과 막대한 부를 지녔다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옆에는 영적인 스승, 교황이 신의 뜻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듯 차분하고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다.


물질의 지배자는 굴복하였으나, 정신의 지배자인 교황의 고귀한 정신은 파멸하지 않는다. 포기한듯 기절한 여인의 모습은 8번 카드의 힘 카드를 떠올리게 한다. 억누르고 막고 있었던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어린 아이는 죽음이라는 존재를 모르는 듯이 흑기사를 바라보며 꽃다발을 바치고 있다. 이 급격한 변화에 공포가 없는 아이는 삶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먼 곳에 흐르는 긴 강은 삶의 흐름과 인생을 의니한다. 강 위쪽 저 멀리 절벽 뒤에는 두 개의 회색 탑 사이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두 개의 탑은 새로운 미래로 가는 통로이며, 떠오르는 태양은 더이상 과거와 같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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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터턴의 죽음(1856), 핸리 월리스(1830~1916)작
캔퍼스에 유채, 91x60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근대적 사유전략은 삶에서 죽음을 추방시켰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처럼 죽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18살에 걸린 늑막염으로 평생 질병과 싸우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그는 죽기 십년 전부터 자신의 병이 완치될 수 없단느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생동안 고립과 광기, 질병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죽은 그의 묘비에는 '그가 평생 동안 죽음과 싸우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라 적혔다. 그는 죽음의 자신의 테마로 삼았고, 그의 작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있었다. 죽음의 궁극에는 삶이 있었던 셈이다. 그는 한 평생 절대적인 죽음을 인정하면서 상대적 실존 사실인 자유를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 <호흡>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질병과 죽음의 생생한 이야기가 수기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은 죽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은 작가가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 안에 있는 힘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부제는 <결단>이고, 작품 속에서 호흡은 삶과 죽음의 메타포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호흡>은 베른하르트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호흡을 멈추지 않고 삶의 길을 가기로 한 결단을 함으로써 죽음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과정을 그린다.

작품의 대략을 살펴보면 외할아버지의 발병으로 <호흡>은 시작된다. 가장 사랑하는 외할아버지가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고, 주인공인 ‘나’도 덩달아 입원하게 된다. 죽어가는 노인들이 입원해 있는 노인 병실에 입원한 베른하르트는 의사들이 포기한 환자였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는 삶을 선택한다. 베른하르트에게 ‘죽음의 방’의 광경은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투병생활로 힘들었지만 같은 병원에 입원한 외할아버지의 격려와 사랑으로 많은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병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던 중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게 된다. 외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실의에 빠지지만 그는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딛고 ‘제2의 인생’을 살기로 결단한다.

이처럼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소설 <호흡>은 열여덟 살의 베른하르트가 병원에서 겪었던 질병과 죽음 직면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각성하고, 죽음이 삶에 새로운 관점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병원은 존재에 대해서 깊이 각성하게 하는 의식의 사색공간으로 묘사된다. 베른하르트는 질병과 죽음의 메타포인 병원을 자의식과 모든 존재에 대한 의식을 얻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베른하르트가 묘사했듯이,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삶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죽음으로 선구하는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성 자각으로 무한한 시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에서 집착해서는 안되는 한계와 자신이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가능성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삶이 더욱 고달프게 느껴진다면, 죽음의 기사를 마음 속에 불러와보자. 그는 어떤 표정도 행동도 하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기 그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이 우리의 삶을 더 소중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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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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