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만조를 기다리며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1.0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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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뿐인 이곳에서, 만조를 기다리며


 

조예은 작가의 <만조를 기다리며>는 독특한 제목과 시선을 끄는 표지에 사로잡혀 단번에 구매를 결정했던 소설이다. 해당 도서는 전작인 장편소설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와 <칵테일, 러브, 좀비>에 비해 상당히 콤팩트한 소설이지만, 이를 상쇄할 만큼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라인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만조를 기다리면>의 도입부는 그 어떤 글보다도 단도직입적이다. 단 네 페이지 짜리 프롤로그 속에 주인공 정해와 소꿉친구 우영이 과거에 나눈 대화가 실려있다. 외딴 망망대해 속의 숨바꼭질, 생명이 위험한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우영은 기꺼이 정해를 구하러 온다.


그 시점에서, 정해는 우영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어떤 마음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될 바다로 뛰어들었는지. 어떻게 어린 마음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곳을 단번에 알아채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는지. 우영은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정해를 마주보며 '내가 찾지 않으면 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거든'이라는 말을 던진다.

 

이를 기억한 정해는 읊조린다. '이딴 식으로 사라지면 내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말 그대로, 정해는 이제 우영이 사라지면 그녀를 찾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다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오래전 약속했던 우정도 현실 앞에서는 힘을 잃기 마련일까. 미아도를 떠나 육지에서 살던 정해는 우영의 존재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연인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귀가하던 금요일 저녁, 정해는 경찰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우영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으며, 장자도항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 그리고, 우영의 핸드폰에서 정해에게 쓰려던 메시지를 발견해 연락했다는 이야기. 우영과의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의문스러운 죽음 사이 혼란스러워하던 정해는 우영이 남기려던 메세지를 전해 듣는다.

 

[우리 숨바꼭질 기억해?]

 

 

 

만일, 상실이 수단이 되는 공간이 존재한다면


 

죽어서도 미아도의 영산에 뿌려지고 싶다던 우영이, 숨바꼭질하던 그날처럼 정해를 죽도록 가만두지 않을 그 우영이 바다에서 자살을 감행했다니. 메세지를 받은 정해는 약 20년 만에 우영이 숨을 거둔 고향, 미아도로 곧바로 출발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죽음, 그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목숨을 거두기 전까지 우영은 영험한 산인 영산의 산지기로서 한평생을 살아왔다. 우영은 영산을 끔찍이도 아꼈기 때문에, 정해는 영산교에 우영의 자살을 풀어낼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다고 판단해 산지기가 되어 영산교에 숨어든다.


그렇게 정해가 잠입한 영산교에서는 교주이자 산주인 최양희가 재회, 사랑과 그리움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소망을 먹고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자와 재회하는 시간을 만들어주겠다는 빌미로 온갖 공양을 받아 거짓된 기도를 행하고 있었다.


죽은 자를 영산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 그의 뼛가루나 소지품이 필요하다.

두 번째, 진심을 다한 기도와 수련이 필요하다.

세 번째, 공양이 필요하다. 여기서 공양은 모든 종류의 재화를 뜻한다.


최양희는 영산에 기도를 올리는 토속신앙에 기초해 영산교라는 신흥종교를 만들고, 많은 공양을 바친 순대로 기도당에 입성하여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재회, 소망, 사랑.

 

그래서, 영산의 모든 이들은 이 세 가지에 매달려 살았다.


산을 사랑했던 우영이 영산이 숨긴 진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었을까. 정해가 알고 있는 우영이라면 그걸 알면서도 가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양희에게 접근하기 위해 값비싼 공양을 바치고 기도에 전념하기로 한 정해는 영산교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소망을 가지고 들어왔지만, 상실과 그리움에 이용당할 뿐인 사람들을.


20년 전 화재 사고로 딸을 잃어버린 할머니 복은은 심야 기도에 참여하고 싶어 온갖 공양을 바친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영산교를 믿는 자의 인생은 어떠할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일 것이다.

 

최양희, 그리고 복은과 함께 새벽 기도를 나서며 정해는 영산교가 숨기고 있는 더욱 추악한 진실을 마주한다. 영산이 숨긴 비밀에는 우영의 죽음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살고 싶은 사람과 죽고 싶은 사람, 그리고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


 

<만조를 기다리면>은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비 종교의 민낯을 가려내는 소설이자, 세상이 서로일 뿐이었던 두 소녀의 이야기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깔린 외로움의 정서와 가슴 먹먹해지는 문체를 통해 정해의 가슴 깊이 새겨진 그리움을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정해가 미아도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가 우영을 잊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몇 가지의 단계로 보이기도 한다. 믿을 수 없는 부고에 충격을 받던 정해는 직접 진상을 파헤치고, 희미했던 진실을 겨우 얻어내 잘못되었던 것들을 원상태로 돌려낸다. 정해는 그제야 우영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녀는 미아도의 새로운 비밀을 간직한 채 현실로 돌아간다. 늘 죽고 싶었고 가족이 싫었던 정해는 뒤늦게서야 살고 싶었으며 가족이 필요했던 우영의 속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영산교에 잠입해 활동하며 정해는 수많은 악행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의 간절함을 저울질하면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 최양희는 마음에 품고 살았던 사람을 보내줄 자신이 없어, 그들의 기억 속 형체를 지켜내려는 이들을 보면서 일말의 안타까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소설 속의 악인인 최양희에게 과도하게 지나친 서사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영산교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 정녕 없었던 것일까? 희망이 아닌 희생으로 가득한 영산교의 교리는 절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조를 기다리면>은 129페이지로 이루어진 단편 소설이다. 단편 소설인 만큼, 거대한 서사와 촘촘히 쌓여 어느 순간 터지는 스토리라인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해당 소설을 통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그리움과 상실이란 무엇인지 자문자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짙은 안개와 밤바다를 형상화한 것만 같은 이 소설 속에서, 담담히 작별을 고하는 정해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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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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