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가끔 나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정서적 상태를 먼저 짚어낸다. 최근 출퇴근 길에서 내 플레이리스트의 점유율 50% 이상을 일본 밴드 음악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는 이 현상을 단순한 '취향'이 아닌 음악적 공통점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기로 했다. 수많은 선택지 중 내가 하필 이 소리에 안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중심에는 '아련한 청량감' 이라는 이질적인 두 정서의 결합이 있다. 리듬은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청량감을 주지만, 그 위에 얹힌 멜로디는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하듯 아련한 정취를 남긴다. 이 모순적인 사운드 문법은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을 넘어, 고된 일상을 지탱할 동력이 필요했던 내게 일종의 정서적 해답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1. Mrs. GREEN APPLE - 'Lilac'
이러한 '아련한 청량함'의 설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곡이 바로 Mrs. GREEN APPLE의 'Lilac'이다. 2024년 일본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곡은 보컬 오모리 모토키가 직접 작사·작곡했으며,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곡은 도입부부터 청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기타 리프로 시작된다. 전반에 깔린 빠르고 복잡한 기타 커팅은 곡에 쉼 없는 추진력을 부여한다. 여기에 오모리 모토키 특유의 에너제틱하면서도 매끄러운 보컬이 더해지면, 마치 과거에 무언가를 남겨둔 사람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듯한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음악적 장치 또한 정교하다. 기본적으로 메이저 코드 진행을 따르지만, 그 사이사이에 순간적으로 배치된 단조 풍의 멜로디가 맑은 미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보컬과 만나 묘한 감정적 낙폭을 만든다. 이 오묘한 분위기는 출퇴근길의 피로감을 지우고 정서를 환기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가사 역시 잊고 지낸 과거의 파편을 상기시키는데, 개인적으로는 소개할 세 곡 중 과거의 기억을 가장 강렬하게 소환했던 트랙이다.
探す宛ても無いのに
찾을 곳조차 없는데도
忘れてしまう僕らは
잊어버리고 마는 우리들은
Oh 何を経て 何を得て
Oh 무엇을 거쳐 무엇을 얻고
大人になってゆくんだろう
어른이 되어 가는 걸까
- Mrs. GREEN APPLE 'Lilac' 中
2. Novelbright - 'Walking with you'
최근 새롭게 발견한 Novelbright의 'Walking with you'는 호소력 짙은 보컬과 묵직하고 힘찬 악기 사운드가 매력적인 곡이다. 일본 현지에서 버스킹 영상이 SNS를 통해 화제가 되며 역주행의 신화를 쓴 곡이기도 하다. 특히 보컬 타케나카 유다이는 최근 국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한국 리스너들에게도 그 실력과 인지도를 확실히 각인시키고 있다.
이 곡의 가장 큰 특징은 드럼과 베이스가 직선적으로 박자를 밀어붙이는 묵직한 리듬 섹션에 있다. 웅장한 드럼 비트가 곡 전반의 에너지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어, 감상하다 보면 청자의 심장 박동이 음악의 템포와 동기화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박진감 넘치는 드럼 사운드를 선호하는 리스너라면 반드시 들어볼 만한 트랙이다.
유다이의 보컬은 호소력이 짙으면서도 끝처리가 매우 명료하다. 전형적인 록 밴드의 날카로운 미성과 달리, 리듬 악기의 무게감과 조화를 이루는 단단한 음색과 창법이 돋보인다. 앞서 언급한 'Lilac'이 화려한 고음으로 질주하는 느낌이라면, 'Walking with you'는 보다 낮고 파워풀한 타격감을 선사한다. 그 단단한 소리 사이로 스며드는 전주와 간주의 서정적인 기타 리프는 옛 기억을 소환하는 강력한 노스탤지어적 힘을 발휘한다.
どんな色いろでも愛あいすることができそう-
어떤 색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絵えに描かいたような幸しあわせを掴つかみ取みとろう
그림으로 그린 듯한 행복을 붙잡자
- Novelbright 'Walking with you' 中
3. N.Flying – 'Delight'
마지막 곡은 한국 밴드 엔플라잉(N.Flying)의 일본 정규 앨범 Brotherhood에 수록된 'Delight'이다. 이 곡은 J-Rock 특유의 빠른 베이스 라인을 골조로 하되, 한국 대중이 선호하는 풍성한 신디사이저와 코러스 레이어를 정교하게 쌓아 올린 사운드가 특징이다.
곡의 구성미 또한 탁월하다. 일반적인 주법으로 흐름을 이어가다 후렴구에서 터져 나오는 베이스 태핑은 곡에 입체감을 더하고, 유회승의 호소력 짙은 보컬과 이승협의 매력적인 저음 래핑은 곡의 빠른 템포 위에서 유연하게 교차한다.
특히 카세트테이프를 되감는 듯한 도입부와 후렴의 벅차오르는 멜로디 라인은 리스너의 감성을 정확하게 짚고, 밤하늘의 별을 응시하는 듯한 아련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위의 두 곡이 조금은 감상적이고 회의적인 아련함이라면 이 곡은 따뜻한 아련함을 담아낸 데 더 가깝다.
엔플라잉은 전 곡이 일본어로 구성된 정규 앨범을 두 차례나 발매했을 정도로, 일본 밴드 사운드의 장점을 자신들만의 색깔로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일본 인디 씬 부터 바닥을 다져온 이들의 이력은 'The world is mine'이나 'Kick Ass' 같은 곡에서도 드러나듯, 한일 양국 밴드 사운드의 교집합을 노련하게 찾아내는 결과물로 이어진다.
이들의 일본 앨범의 트랙들을 차례대로 감상하다 보면 이들이 일본 밴드 음악의 문법을 한국적 감성으로 세련되게 구현해내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赤い星 Venus. 暁の Delight
붉은 별 Venus. 새벽의 Delight
目を閉じる Every time I feel
눈을 감아 Every time I feel
You're always in my heart
- N.Flying 'Delight' 中
***
결국 내 플레이리스트를 장악한 이 세 곡은 극대화된 서정성과 에너지가 만나는 지점에 맞닿아 있다. 감성을 자극하는 멜로디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리듬이 만드는 극명한 대비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우리가 이에 반응하는 이유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고 싶은 ‘청춘의 속도감’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낯선 언어와 강렬한 밴드 음악이 그 어떤 긴 위로보다 명확하게 마음을 어루만질 때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회상’에 머물지 않고, 그 찬란했던 순간의 에너지를 빌려와 오늘을 다시 살아내게 하는 뜨거운 ‘현재의 동력’이 된다.
밝음과 우울 그 중간 지점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을 추억하게 하고, 그 힘으로 다시 순진한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밴드 음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자, 내가 오늘도 이 노래들을 멈출 수 없는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