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이현의 열대탐닉 [도서]

신이현의 열대를 보내는 다섯가지 방법, 열대를 즐기는데 빠지다
글 입력 2019.02.2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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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帶耽溺

신이현의 열대를 보내는 다섯가지 방법, 열대를 즐기는데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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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날 죽일듯이 내려다 본다. 이글거리는 불길은 환상이라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에 있음에도, 몇십/몇백광년을 뒤로 한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준다. 아, 괴로움 뿐일까?

나는 늘 겨울이 좋다 외치고 다녔다. 차가운 겨울은 말을 붙일 수 없을정도로 도도했고, 만지는 손길을 내쳐내는 차가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버석거릴만큼 건조했고, 온 뼈마디와 이빨이 딱딱 떨릴 정도의 두려움을 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겨울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나에게는 없는 단호함이 투명한 뼈 처럼 있었으며, 감히 따라할 수도 없는 섬칫함이 뼈 바깥을 둘러 존재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겨울같은 사람이 아니다. 겨울의 그런 날카로운 매력들을 사랑하는 나는 그 누구에게도 끝내 한가지 남은 감정을 거두지 못하는 찐득거리는 사람이며 감정과 말을 퍼붓기를 좋아하는 갑작스러운 수다가 일상인 사람이다. 또 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가라앉는, 이성과 감정의 중간이 없는 뜨거움을 품고 살았고, 지칠줄 모르는 열기와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광기를 사랑하는 - 여름에 닮은 사람이다.

일년의 딱 3개월, 한국의 짜치게 더운 여름이 목구멍이며 식도를 모두 틀어막아 괴로울 때 조차도 나는 더운 나라로 떠났다. 와인이 조용히 잠자기 좋은 서늘한 온도의 러시아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말간 햇빛으로 빛나는 홍콩 소호의 높고 낮은 지대를 오르내리는 땀방울이 즐거웠고, 캘리포니아의 정원에서 햇볕을 미용실 기계 삼아 나른히 눈을 감고 머리칼을 검게 물들이는 시간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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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호안끼엠 호수



열대를 탐耽한 책을 수백권의 책이 뽑아달라 아우성치는 도서관에서 고른건, 아마 우연이 아닐거다. 2월의 소복히 쌓이는 눈을 맑은 기대로 들떠 만져보면서도 마음의 한쪽엔 여름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모두가 녹아내려 아우성치던 올해 여름, 나는 열대로 떠났다. 붉은 마음과 이념과 태양이 한데 뭉쳐 온 거리를 덮은 하노이에서 여름을 흠뻑 즐기고 왔다. 그토록 더운데도 실내의 에어컨보다는 바깥 바람의 시원함을 좋아하는, 그리고 그냥 바깥보다도 호안끼엠 호수의 강바람을 사랑하는 열대를 한달동안 게으르게 쌓고 돌아왔다. 이 책을 읽고, 내가 탐닉했던 열대가 또 다시 덥썩 마음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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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파크의 야자수


열대탐닉의 저자 신이현씨는 열대를 보내는 다섯가지 방법에 대해, 다섯가지 과일, 다섯가지 사람으로 써내려갔다. 작가가 6년동안 열대에 살며 머물렀던 수영장에서 만난 다섯명의 사람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지현이나 재간, 혹은 니콜이나 리온같은 익숙한 이름이 아니라 코코넛, 망고, 두리안, 불꽃(용과), 파파야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며 열대의 더위를 껴안고 살아간다. 열대의 대표적인 과일, 물이 찰랑거리는 코코넛이 되어 누군가의 뎅기열을 식혀주고 망고내음새를 가득 바른 채 게으름을 피운다. 또 용과를 닮은 불꽃과 같은 머리로 뜨거움을 품고 돌아다니며 파파야라는 황혼의 색깔로 입 안을 가득 채운다.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바라보며 나의 열대를 떠올려 보았다. 떠올린 열대의 수많은 경험,기억,감정 중 한 조각을 블로그에 적어본다. 딱딱한 겉 피, 과일이라고 보기엔 짐승의 무엇같기도 한 털북숭이 열매. 잔뜩 힘을 주고 칼을 지렛대 삼아 빠각, 하고 깨트려 분리하는 속이 말랑한 조각 하나.

내 코코넛의 경우는 -


코코넛의 경우

열대의 카페, 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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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사바나 카페


커피를 사랑하는 열대에서는 어딜 가더라도 길거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지 못 할 정도로 좁은 인도일지언정, 인도 안쪽에서는 작은 앉은뱅이 의자와 책상이 꼭 있었다. 커피를 사랑하는 열대인들은 아침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그곳에 앉아 더위를 느꼈다. 끈적한 공기로 가득 채워진 목구멍을 더 끈적한 검은 액체로 흘러내리고 나면, 열대의 더위와 먼지도 모두 씻겨내려가는 상쾌함을 맛 볼 수 있었다. 카페에서는 다양한 음료수들을 팔았다. 한 블록 건너 카페가 마주보고, 건물 한 칸에 카페 하나가 자리잡지 않으면 아쉬운 한국인데도 열대의 카페에 비기지는 못한다. 다양한 열대과일은 자라며 더움을 그대로 담아냈기에 약간의 힘으로도 쉽게 녹아흘렀고, 다양한 음료수들을 만들기에 아주 적당했다.

그런가 하면 음료를 굳이 만들지 않아도 이미 음료수인 녀석도 있었다. 코코넛이 그런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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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음료수


내가 집으로 삼은 에코파크, 에코파크에는 카페가 가득했다. 밥을 파는 가게는 단 하나 - 그마저도 쌀국수와 각종 베트남 현지식을 파는 아주 기본중의 기본인 식당 하나뿐이었는데도 카페는 3곳이나 있었다. 저마다 나름의 컨셉도 다양해서 반미를 파는 카페, 케이크를 파는 카페, 담배와 칵테일을 파는 카페.. 무얼 먹을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무얼 마실지는 고민 할 수 있는 곳, 그곳들이 열대의 카페들이다.


얇게 저며낸 과일 속살들을 투명한 유리잔에 조심히 담아내고 끈적이는 시럽과 반짝이는 탄산을 가득 붓는다. 더위에 쌕쌕 숨을 내뱉는 말랑한 입술을 기대하며 사라락, 설탕을 모서리에 묻히고, 눈이 서운할까 꺾인 꽃 한송이를 조심히 꽂아 내기도 한다. 혀가 움찔 놀라는 초록맛의 라임, 기분좋게 녹아내리는 노란맛의 망고, 입 안을 샅샅히 촉촉하게 채워주는 빨간맛의 수박. 아, 내가 열대에서 사랑해 마지않았던 7-UP을 빼놓을 수 없다. 반짝이는 전광판 무늬만큼이나 다양한 맛을 가득 담고있지만 색깔만은 투명히 다 보였던 세븐업까지, 무수히 많은 음료들이 열대의 카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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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포피스의 '라임' 음료수


다양한 음료가 가득한 열대의 카페에서 코코넛을 선택한다는건 뭔가 특별한 행동이었다. 어떤 색깔으로건 입을 가득히 채우는 - 색이 없는 세븐업 마저도 퐁퐁히 솟아오르는 기포는 내 목을 상쾌하게 터트려주었다 - 색색의 음료를 포기하고, 미적지근한 색깔과 미적지근한 장식의 코코넛을 선택할 때는, 정말로 열대의 생명을 삼켜 뱃 속 깊은곳의 갈증을 모두 채워주고싶다는 원초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했다.

열대가 아닌 곳에서 코코넛은 생명을 잃는다. 버석하게 들러붙는 코코넛 칩에는 달콤함은 있을지언정, 매끄러운 촉촉함이 없다. 앙증맞은 그림과 함께 종이팩에 담긴 코코넛 워터에는 시원함이 있을지언정, 생기넘치는 미묘한 단맛은 없다. 코코넛은 이리저리 긁힌 겉 상처, 딱딱한 껍질, 무거운 열매를 흔들면 들리는 - 찰랑 찰랑, 귀를 씻어주는 물소리, 말랑하고 촉촉한 속, 그리고 그 생기 위에 유일하게 인공적인, 또 인간적인 우산 장식 하나. 생명이 가득한 코코넛이다. 더움이 가득한 열대이기에 물을 갖고 태어나는 코코넛은 경이롭다. 열대가 아닌곳에서는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 또한.

열대의 코코넛은 미지근하지만 시원하다. 열대 커피의 설탕이 묵지근히 씹히는 단맛은 아니지만 입에 한가득 우물거리면 느껴지는 미묘한, 미묘해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단맛이 존재한다. 둘둘 말린 빨대로 주욱 빨아들이면 열매 그대로의 생명력이 딸려올라온다. 더움을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견뎌내고 말랑하고 촉촉한 속내 안에 물을 가득히 담고 있다. 더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생명수이다. 아이러니하다. 목이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생명을 다하는 인간처럼 코코넛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며 생명을 다한다. 코코넛은 땅의 품에도 안기지 못하고 인간의 갈증을 해소하는데 쓰이고 만다. 모로보나 코코넛 그 자체로써는 죽어버렸는데도 인간인 나에게 다시 생명의 일부로 채워진다. 나의 갈증을 해소하고, 내 뜨거움을 말갛게 식혀주며, 나의 열대를 가득히 채워준다. 그의 생명은 나의 음료수였지만, 죽어버린 생명은 내 새로운 삶을 채워준다. - 내가 경험한 코코넛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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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바라보던 해의 몰락


열대는 뜨겁다. 위에서 열대를 이른 바와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어 조심스럽지만, 사람의 피부 살갛 뿐 아니라 정신을 모두 뜨겁게 달구는 광기가 있다. 그러나 열대에 간 사람들이 모두 가득 불타올라 돌아오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타는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열대를 견디지 못해 불타올라 재가 되는가 하면, 누군가는 열대의 뜨거움마저도 너무 차갑고 시리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이는 뜨거움에 기분좋게 녹아내려 열대 그 자체로 융화되는가 하면, 어떤이는 열대의 열기에 가득 그슬려 쓰라림만을 남긴다.

아마 나의 열대는 그 누군가의 열대와도 같지 않을테다. 열대를 보내는 다섯가지 방법에 대해 쓴 신이현 작가님과도, 책 속의 두리안과도, 망고와도, 코코넛과도, 파파야와도.. 그리고 불꽃과도 같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열대를 바라보며 나의 열대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어느날 창 밖을 바라보면 보이는 해의 몰락을 다시 기억해냈고, 귀를 시끄럽게 때리던 오토바이 경적소리를 일깨워냈다. 한산한 카페에서 조심스레 눈치를 보던 열대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인삿말 한마디에 웃음을 짓던 미소를 스스로 따라해보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주 다르지만, 또 같은 열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가슴 속 깊은곳의 뜨거움을 기억한다면 이는 열대에서 온 것이요, 끈적하고 부드러운 단맛의 과일을 떠올린다면 이또한 열대에서 온 것이다. 열기를 마침내 한조각 뺏어버려 조금은 달라진 가슴마저도, 우리의 열대에서 온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열대를 모른대도 조금은 사랑하고, 또 조금은 그리워할 수 있을테다. 우리는 모두 열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또한 열대 탐닉의 다섯 열대를 그리워하며 오는 여름에는 어느 열대를 가득 담아낼지 즐겁게 고민해본다.



[김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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