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필' 파고들기, 오래, 끈질기게, 마음을 다하여 [도서]

연필의 다양한 몸짓, 작고 사소해서 소중한
글 입력 2018.04.2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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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13자루의 연필


“연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친구의 마음이다.
 
처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고백했을 당시 친구는 나에게 13자루의 연필을 선물로 주었다. 연필 끝에는 H~9H, H~4B라는 표시로 심이 구분돼있었다. 평소 샤프심을 구입할 때 H, HB라는 약자는 익숙했지만, 그렇게 넓은 범위의 경도와 진하기의 연필을 접한 건 처음이었다. 친구 덕분에 보통 19단계로 구분하는 연필 중 나는 13단계나 써볼 수 있는, 전공자에게도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셈이다.


연필심의 강도(Hardness)에 대한 표기는
전 세계가 유사하게 쓰고 있다.
심을 제작하는 과정에 있어서
흑연과 점토를 섞는 비율에 따라
그 단단함과 무른 정도가 차이가 난다.

흑연에 비해 더 많은 점토를 넣으면
연필심은 더 단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단단한 심에는 H,
부드러운 심에는 B라고 표시한다.
이러한 지정은 미국의 표현기법에서 유래된다.
B는 BlackH는 Hard, F는 Fine(견고한, 단단한)으로 표기한다.
 
이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총 19단계로 구분한다.
9B  8B  7B  6B  5B  4B  3B  2B  B  HB or F  H  2H  3H  4H  5H  6H  7H  8H  9H

-책 <그래, 나는 연필이다> p.45


차마 써버리기 아까워 몇 가닥의 선만 그어보고 고스란히 상자에 넣어 둔 13자루의 연필. 이 연필들은 내가 그림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때 마음가짐과 그런 나를 받아준 친구의 마음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쓸 수 없는 그 연필들은 책상 서랍 맨 위 칸 구석에서 몇 년을 넘게 잠들어 있었다.
 

만일 당신이 연필이 부러지는 것에 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연필을 깎지 않고 그대로 놔둬야 해요. 하지만 그 경우에는 연필을 사용할 수 없어요. 연필을 사용하려면 깎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슬퍼하거나 실망할 수 있는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인생이죠. - 연필깎이 전문가 데이비드 리스 (p.93)

 
<그래, 나는 연필이다>를 보는 내내 친구에게 받은 이 연필이 떠올랐고, 아주 오랜만에 꺼내 하나씩 써 보았다. 9H 연필은 힘을 세게 주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단단했다. 생각보다 6H부터 쓸 만 했다. 종이 위에 적당히 사각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금세 닳아버리는 연필이 다시 아까워져 도로 상자에 고이 집어넣었다. 데이비드 리스의 말처럼 나는 연필을 깎아서 생길 수 있는 슬픔과 실망을 유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연필들은 나에게로 와서 본래의 쓰임을 잃어버린 대신 ‘추억’이라는 상징적인 옷을 입게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연필도 단순히 연필을 사용하는 용도를 넘어 '연필이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물음으로 깊어진다.
 


자유, 기본, 고유한, 따뜻한


<그래, 나는 연필이다>에서 저자는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독자에게 ‘연필’하나의 소재에서 뻗어나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작고 사소한 사물에 불과한 연필의 한계는 어디까진지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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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필을 깎기 전 체조를 하는 박지현 저자와 데이비드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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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타 알테스의 연필 껍질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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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튼 게티가 9.11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0년 간 만든 3000개의 눈물방울


연필에 대한 오랜 연구를 거듭해 온 헨리 페트로스키 교수, ‘연필 깎기 전문가’라는 조금은 낯선 직업을 가진 데이비드 리스, 놀라울 정도로 고도의 섬세함을 발휘하는 연필심 조각가 달튼 게티, 세계의 다양한 연필을 사용하며 후기를 남기는 유투버 마티 오윙스, 연필로 직접 글을 써 잡지를 만든 황성진, 연필로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 극사실주의 연필화가 디에고 코이, 연필 껍질로 행복한 작업을 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마르타 알테스 등,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소중하고 특별하다.
 
흥미롭게도 서로 다른 계기, 방법, 의미로 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들렸다. 연필은 삼나무와 흑연, 즉 자연의 한 부분인 나무와 광물로 만들어지는 도구이기 때문일까. 유독 '고유의', '따뜻한', '기본적인', '자유'라는 수식어와 잘 어울렸다.


연필로는 쓰고 지울 수가 있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자유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실수해도 지울 수 있는 자유 말이에요.
- 헨리 페트로스키 교수 (p.40)
 

이 연필, 아니 기존의 다른 어떠한 연필도 그러하지만 가장 고유한 도구입니다.
- 마티 오윙스 (p.170)
 

연필이라는 게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인 것 같아요.
- 안재훈 감독 (p.212)
 

연필이 기본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 연필로 그린 작품에는 따뜻함이 있어요. 디지털로 따뜻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애를 많이 써야 하더라고요. 연필은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그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고, 연필만의 느낌 때문인지 우선 받아들이기에 친근감이 있죠.
-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 3년차 인턴 (p.225~226)


 

왜, 하필 연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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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흔하고 사소해서 지나칠 수 있는 사물을 깊이 성찰하라는 것. 메시지가 단순한 만큼 이야기 방식에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한계가 있다. 잘 들여다보면 특별하지 않은 사물은 없다. 즉,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꼭 ‘연필’이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한 작가, 전문가, 연구자 등이 사용한 소재가 연필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면? 사물 하나의 쓰임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하는 기획은 어쩌면 평범한 것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 단순한 메시지를 과연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결정적인 이유다.


15년 전, 
연필은 그다지 빛나지 않던
당시의 ‘나’에 관해 생각하게 하였다.

우리는 커다란 것만을 연구하고 좇는 시대에 살기에
작고 의미 있는 걸 찾는 데에 너무나도 서툴다.
주변에서 작은 것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일.

그래서 나는 연필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연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들은 연필을 진정 제대로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고 즐기는 사람들은
분명 그 길을 보여줄 것이란 믿음이 있다.

(p.331)


책을 덮고 다양한 작업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연필의 발자취를 오래, 끈질기게 좇은 박지현 저자의 열정이 더 놀랍고 새롭게 느껴졌다. 어쩌면 '연필'이란 소재는 샤프나 펜을 즐겨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만약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연필을 접할 기회가 더 적었을 것이기에, 저자가 처음 연필 다큐멘터리 제안서 심사를 받을 때 위원들의 반응(p.338)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주위의 심심한 반응에 물음표를 달고 재차 자신이 가진 확신을 더욱 단단히, 확고히 해 나간다.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에 성공하고,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여 책 발간에 이른다. 아마도 이 책은 박지현 저자의 열정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취재하는 저자는 어느 순간 비슷한 지점에서 만난다. 바로 사소한 '연필' 하나가 인도하는 길 위, 별나지 않지만 편안하고 묵직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 길의 끝, 보석 같은 무엇이 막 발견되는 그 곳에서.

*

사실 미술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을 때, 그림을 그리면 그렇게 무수히 많은 연필을 쓰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은 친구는 어떻게 ‘그림=연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 친구는 나의 진로에 대해 적어도 한순간은 나보다도 더 구체적인 미래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래서도 연필이란 선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그 친구의 진로를 그만큼 진지하고 세심한 마음씨로 생각한 적 있는가?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이다.

고백하면 당시 선물은 연필이라서가 아니라, 친구의 마음이 가깝고 익숙해서 ‘작고 사소’했다. 어렸다는 변명을 하고 싶지만 더 좋은 마음으로 보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의 내가 연필의 의미를 이렇게라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이 일이 가능했던 까닭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조용히 빛나고 있던 친구의 마음 덕분이 아니었을까, 오래도록 저자를 이끈 연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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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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