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녕, 나의 유럽! -2 [여행]

글 입력 2018.02.2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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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의 한 달 유럽여행 루트라고 하기에 사실 나의 여정은 조금 특이했다. 독일에서 출발해서 발칸반도를 거쳐 그리스로 향하는 루트였기 때문이다. 일단 발칸반도를 거치게 되면 그 이전의 나라들에 비해 이동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이 많이 없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여행 정보도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발칸 반도는 내게 세계사 속에서 전쟁을 주제로 자주 등장했던 것이 기억의 전부인 ‘미지의 땅’ 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여행을 해보자는 데에 큰 뜻이 있는, 함께 떠난 친구의 적극적인 권유로 나는 어렵사리 발칸반도 여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 발칸반도의 첫 여행지가 바로 세르비아였다. 정보가 많이 없는 곳인 탓에 어쩐지 설렘보다는 불안과 걱정으로 뒤덮인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여정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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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발칸으로 가는 시작부터 큰 고비가 찾아왔다. 부다페스트의 부쿠레슈티 역에서 베오그라드까지 하루 두 번밖에 운행되지 않는 기차를 아침부터 놓치고 만 것이다. 열차의 출발 예정 플랫폼을 사전에 잘 공지해주는 우리나라와 달리 기차 플랫폼이 갑자기 변경되어도 공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서, 알아서 잘 타야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플랫폼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어 버렸고, 우리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기차를 놓쳐버렸다. 때문에 부다페스트의 다른 역으로 이동해서 다시 기차표를 예매하고 점심 즈음에서야 기차에 탑승, 그리고 장장 8시간 여의 기나긴 기차 이동. 세르비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는 극심한 피로에 그만 지쳐버렸다.

 하지만 그 어긋나버린 일정은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새로운 만남과 아직도 감사한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세르비아로 향하는 기차 안, 발칸의 짧은 해가 지고 캄캄한 어둠만이 우리가 탄 낡은 열차를 온통 감싸 안을 무렵이었다. 안내방송도 없이 기차가 멈추고, 내 맞은 좌석에 스무 살 언저리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이 앉아 이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고, 계속되는 불안과 걱정에 피로는 극에 달했다. 그리고 나서 10분쯤 지났을까, 내 대각선 앞에 앉은 여자 아이의 핸드폰에서 익숙한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한국의 아이돌 그룹 노래였다.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발칸에서 우연히 처음 들은 음악이 한국 노래라니. 순간 알 수 없는 반가움이 밀려왔고, 호기심에 대각선에 앉은 친구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차가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안내방송이 없어 혼란스러워 하는 우리에게 또렷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이제 마지막 역이에요. 여기서 내리시면 돼요.”

 한국 음악 벨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그 순간 온종일 피로감에 시달렸던 우리는 금세 생기를 되찾았고, 그 친구에게 한국어로 질문을 쏟아냈다.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알고 보니 18살, 고등학생인 그 친구의 이름은 아냐였다. 아냐는 세르비아에서 한국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자신이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한국인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너무 떨린다고 했다. 그리고는 곧 자신의 친구들을 보내더니, 우리를 숙소 앞까지 선뜻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마침 세르비아가 EU 통합 유심이 작동하지 않는 나라인 탓에 미리 저장해둔 구글 지도의 대략적인 사진만 보고 숙소를 찾아가야 했던 우리로서는 아냐가 마치 생명의 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고마움에 캐리어에 싸온 한국라면과 레토르트 밥, 김 등등 한국음식을 이것저것 챙겨주었고 그렇게 세르비아의 첫인상은 예상했던 차가움이 아닌 뜻밖의 따뜻함으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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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아냐는 이 곳,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우리가 만난 고맙고 감사한 인연의 첫 시작일 뿐이었다. 친구의 캐리어 바퀴가 부서져가며 도착한 우리의 숙소인 ‘Home Sweet Home’ 호스텔의 사장 다미르 삼촌은 우리가 오자마자 부서진 캐리어 바퀴를 몹시 걱정해주며, 떠나는 날 전까지 자신이 꼭 바퀴를 고쳐놓겠다고 했다. 그리곤 곧 숙소 이곳 저곳을 설명해주며 우리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주었다. 숙소는 이름처럼 따뜻한 가정집 분위기였고, 삼촌을 비롯한 그 곳의 스태프들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친절과 배려가 있었다.

 한편, 그 곳에서 만난 또 다른 인연도 있다. 바로 혼자 휴가 차 유럽 이곳 저곳을 여행 중이셨던, 또 다른 이 곳의 투숙객 중 한명인 멕시코인 에드워드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우리를 마치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체크인 후 먼저 반갑게 말을 걸어주셔서 긴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치 ‘굿 윌 헌팅’에 나오는 숀 교수님을 만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어른으로서 젊은이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동등한 입장에서 ‘친구’로 생각해 주시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다음날이 되자마자 두 분에게 한식으로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로 마음먹었고, 두 분 다 흔쾌히 오늘 저녁을 행복하게 기다리겠다고 답해주셨다. 그날 내내 베오그라드 시내를 둘러보는 와중에도 우리는 머릿속에 온통 오늘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하면 멋지게 대접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우리가 대접하는 요리가 그 분들에게는 첫 한국음식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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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다행히도, 요리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다미르 삼촌이 다소 매워하긴 했지만, 정말 맛있게 드셔주셨다. 에드워드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멕시코 인이라 이것쯤은 끄떡없다며, 밥 두 공기를 다 드셨다.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각 나라의 음식에 대한 얘기는 이윽고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관련된 얘기로 이어졌다. 삼촌과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셨다. 우리는 짧은 영어지만 최대한 한국에 대해 많이 알려드리기 위해 애써서 말했다. 두 분은 매우 흥미롭다며, 꼭 여행을 가보고 싶어졌다고 하셨고, 오늘의 ‘한국의 밤’ 개최자인 우리 두 명은 매우 뿌듯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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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냥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베오그라드는 그렇게 차츰차츰 우리의 여행지 중 가장 따뜻한 도시가 되어버렸고, 베오그라드의 기억은 온통 ‘좋은 사람들’로 가득 들어찼다. 불가리아로 이동하기 전 날 밤 몸살기운에 시달리는 내 친구를 몹시 걱정해 주었던 호스텔의 모든 투숙객 분들이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난다. 친구의 얼굴을 보더니 곧바로 이란에서 챙겨온 약초로 끓인 차와 자몽을 가져다 준 이란인 마랄 언니, 늘 행복한 웃음으로 모든 이들을 대하며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던 그린란드인 헨느 이모. 그렇게 고맙고 감사한 인연들 덕분에 베오그라드는 온통 행복한 추억으로 마음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게 되었고, 나는 앞으로도 내가 만난 이 고마운 사람들의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기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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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이 곳,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의 4일은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만 당연한 깨달음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좋은 여행의 기억은 ‘풍경’과 ‘사람’, 두 가지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로 기억되는 곳은 ‘풍경’으로 기억되는 곳보다 훨씬 더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이 이 곳과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준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그 동안은 ‘풍경’을 기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나지만, 이제는 따뜻한 ‘사람’과의 인연을 기억하기 위해서 여행을 한 번 떠나볼까 한다. 늘 고맙고 고마웠던 그 곳, 베오그라드를 언제나 마음 한 편에 담아두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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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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