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후의 명작, 그 훌륭함에 관하여 _ 불후의 명작展

천천히, 조금만 차분히 그 대단함을 느끼고 오세요
글 입력 2018.01.25 15:2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름만 보아도 설레는
‘불후의 명작’ 전시에 다녀왔다.


 불후의 명작이라니. ‘훌륭하여 그 가치가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 그런 그림들이 놓여있다는 뜻이었다. 발걸음을 빨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KakaoTalk_Photo_2018-01-25-15-31-26.jpeg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천천히 보시라는 글귀였다. 현대미술은 본다고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음의 눈으로 천천히 음미하시라는 뜻이었다. 맞는 소리다. 일전에 배운, ‘현대미술의 이해’ 강의에서도 교수님이 그러셨다. “현대미술은 의미가 중요해서, 그 뜻을 알아낼 시간이 필요해요.” 왠지 예감이 좋았다. 교수님의 권위 있는 말과 똑같은 말을 건네는 미술관이 있었다. 왠지 전시가 기대되는 것이었다.
 
 이 전시가 의미가 있는 이유를 안다. 그것은 ‘한국’과, ‘현대’, 그리고 ‘거장’과 관련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껏 우리의 미술을 무시해왔다. 무시까진 아니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미술을 폄하해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저 먼 나라의 반 고흐였고, 저 먼 곳의 피카소였다. 그러던 중, 우리의 미술에 눈길을 돌린 전시가 있다는 것은 꽤 기념비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그것이 ‘한국 미술의 저력은 전통에 있다’라는 의미 아래 열린 것이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나라 근현대 거장들의 그림을 모아놓은 전시라니, 왠지 그 특별함에 설레었다.


   KakaoTalk_Photo_2018-01-25-15-31-02.jpeg


 과연 전시장은 꽤 권위 있는 모습으로 꾸며져 있었다. 벽에 붙은 ‘불후의 명작’이라는 글자에는 위엄마저 느껴졌다. 왠지 경건해지고, ‘아. 이 곳을 지나면 대단한 것이 있겠구나.’하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었다. 과연 그랬다. 거장 8명의 그림은, 그림에 대해 무지한 필자가 느끼기로서니도 대단한 느낌이 있었다. 그게 위엄인지 위압인지, 그 예술성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사진학에는 ‘푼크툼’과 ‘스투디움’이라는 개념이 있단다. 롤랑 바르트라는 사람의 이론인데, 사진을 볼 때 느껴지는 공통된 느낌은 ‘스투디움’이라고 불린다. 아기 사진을 보았을 때, 사랑스러움을 느꼈다면 당신은 스투디움을 체험한 것이다. 그 반대의 개념은 ‘푼크툼’이다. 이는 필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개념이기도 한데, ‘관객을 찌르는 한 부분’이란 뜻이다. 어떤 사진을 보았을 때, 갑자기 어떤 부분에 확 사로잡히고 꽂혀버렸다면 당신은 푼크툼에 사로잡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종이에 채색, 130x162cm.jpg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1976

   
 이번 전시에서 필자의 ‘푼크툼’은 천경자의 그림이었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 그림이 필자를 사로잡았다. 그 많은 그림 중에서도, 걸음을 잡아놓고 응시하고 응시하게 했었다.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그 그림의 모습은 이러했다. ‘반짝임’. 그림이 반짝였다. 이상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면 반짝이가 빛났다. 그림에 반짝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반짝이가 어떤 기법이고 화법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것이 오랜 감상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혹시 그 반짝이가 궁금하다면, 보고오시라. 추천 드린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지켜 본 그림은 미묘하고도 오묘했다. 이름조차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라니, 49는 무엇이고 슬픈 전설은 무엇인가.


스크린샷 2018-01-25 오후 3.38.58.png
천경자, 1924.11.11 ~ 2015.08.06

 
 그 후에 집에서 알아본 이야기는 이렇다. 천경자에게는 방랑하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집을 나가고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천경자는 그를 그저 맞아주곤 했다고 한다. 이해는 잘 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녀의 어머니까지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던 중 그 남편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49살의 나이, 천경자는 드디어 그 기다림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나라로 날아가 버린다.
 
 이 그림은 그 비행들의 소산인가보다. 49페이지는 그녀 나이 49를 의미하는 것이고, 슬픈 전설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왠지 그림의 실마리를 푼 것 같아 두근거렸다.
 
 차후 집에서의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림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자면 ‘미묘함’이 그 주제가 될 수 있겠다. 그 미묘함은 색감과 울고있는 여자, 그리고 동물들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새파랗고 샛노란 동물들과, 누런 배경의 조화. 그것이 미묘함을 조성했나. 그게 아니면 뜬금없이 코끼리의 위에 앉아 울고있는 하얗고 까만 그녀가 미묘했나. 그것도 아니면, 그녀를 무심히 지켜보는 동물들의 시선이 그러했나. 잘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그림이 심미적으로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필자와 같은 관객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불후의명작_배너이미지.jpg
 
 
 그림은 꽤 오래 남는다. 시선을 떠나더라도, 그 미묘함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또 그 그림을 둘러싸던 전시장의 위엄과 위압이 몸에 남았다. 꽤 무겁고 대단한 곳을 다녀온 것 같다. 한국 미술의 저력은 정말로, 전통에 있는 것이었다. 그 위압과 위엄의 한국현대미술 전시장에서 느낀 바로는 그렇다. 또, 지금의 현대 미술가들이 얼마나 그 위압과 위엄의 전통을 떨쳐내느라 고군분투하고 노력해야 했을지가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만큼 거장들의 그림은 대단했다.
 
 이름만 보아도 설레는 ‘불후의 명작’이라는 전시의 제목은 꽤 잘 지은 것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그 그림들에는 ‘훌륭하여 그 가치가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마땅하다. 그런 그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좋았다. 그 분위기도, 소개말도, 소개 없는 무심함도 좋았다. 그럼 필자를 둘러싸던 위압감을 이곳에 내려놓으며 이만 글을 마친다. 아참, 천경자 그림의 반짝이의 정체를 아시는 분은 연락 주시길. 아직도 궁금해 마지않아 하고 있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볼 수 있는,
《불후의 명작;The Masterpiece》展


포스터_불후의명작.jpg
 

기간: 2017.12.08(금) - 2018.06.10(일)(예정)
장소: 서울미술관 제 3전시실
주최 및 주관: 서울미술관


[손민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