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말 대잔치'에서 이끌어낸 실존주의 철학, 「고도를 기다리며」 [문학]

고도의 도움이 없어도 우리는 어쩌면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글 입력 2017.06.0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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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심경은 솔직히 ‘무섭다’였다. 일단 고도가 ‘해발 고도’에서 쓰인 것처럼 어떤 것의 높이와 같은 것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대상이라고 착각했다. 또한 ‘기다림’이란 것에는 기대가 들어있기도 하고, 어떨 땐 절박함이나 애절함이 들어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오해와 기다림의 이미지 때문에, 제목만 얼핏 보고선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철학이라면 지레 겁을 먹는 나로서는 선뜻 책을 집어들 수가 없었다. 결국 노벨 문학상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에 이끌려 책을 펴게 되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이 텍스트는 소위 ‘아무말 대잔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에스트라공
토요일이라니 어느 토요일 말이야?
오늘이 토요일이던가?
아니면 혹시 일요일일 지도 모르지?
아니면 월요일이거나 금요일일지도 모르고.

블라디미르
(마치 날짜가 풍경 속에 적혀 있기라도 한 듯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며)
그럴 리가 없다.

에스트라공
그럼 목요일인가?

블라디미르
어떡하지?

에스트라공
혹시 그가 어제 저녁에 왔다가 허탕을 쳤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오늘은 나타 나지 않을걸.

블라디미르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우리가 어제 저녁에 왔었다고 했잖아?

에스트라공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사이)
자, 그 얘긴 이제 그만두지 않을래?

 
 
  우리의 두 주인공들은 ‘고도’라고 하는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대상을 기다리고 있다. 그 존재가 부랑자인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실상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를뿐더러 그가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그가 자신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정말로 내밀지 내밀지 않을지조차도 불분명하다. 고도가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것이라고 전하는 ‘소년’이 등장하지만,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몇 시인지 모르는 두 주인공들을 생각해보면 고도가 온다는 것은 허황된 약속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은 계속해서 ‘아무말 대잔치’를 하다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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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텍스트를 읽었는지조차 불분명한데, 2막이 시작된다.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시작된 2막은 1막과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두 주인공은 역시 끊임없이 지껄여대고, ‘기다리는 행위’를 위해 시간을 보낸다. 아니, 가끔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순환구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래를 부른다거나, 말장난을 치며 논다던가 하며 이리저리 시간을 때워보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1막과 비슷하다면, 2막의 존재는 어쩌면 상황이 반복될 것임을 더 처절하게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도의 존재 여부, 구원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말을 한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끝을 예상할 수도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으며 또한 외로운 것이다. 이 작품은 '부조리극'이라고 여겨지는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으로 대표된 인간의 삶이란 ‘기다림’이지만, 오지도 않을 존재를 기다린다는 것에서 무언가 부조리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는 실존주의 철학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을 죽음을 기다릴 뿐인 대상으로 보기에, 지금 살아내고 존재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기에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두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는 고도의 존재를 텍스트 속에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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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LO'라는 말이 요즘 유행한다. 'You Only Live Once'라는 뜻으로 한 번 사는 인생 '지금의 행복'에 초점을 두자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시발비용’이라고 해서 홧김에 쓰는 돈이라는 의미를 가진 신조어도 등장했다. 전자는 긍정적인 맥락이고 후자는 조금 자조적인 해석이 가능한 용어지만 어쨌든 둘 다 '현재의 나'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비슷한 이유지 않을까?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는 이미 떠나간 사람일 수도 있고, 앞으로 오지 않을 허황된 존재일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진짜로 고도가 구원을 베풀었을 때보다 더 나은 현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권리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물론 전제한뒤에, '현재' '나'의 감정에 충실하는게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포세대'라 불리우며 사회 문제로 취급받는 청년층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벅찬데 미래까지 대비하며 살아가야 되나?" 사실 아무도 그들에게 정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불명확한 답을 추구하며 살아가기에 여유가 없다면, 어쩌면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여유를 추구해도 괜찮은 것 아닐까? 고도의 도움이 없어도 우리는 어쩌면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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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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