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처받고 싶지 않은 유년의 이야기, 파수꾼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1.3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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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수꾼. 파수꾼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떠올랐던 건 해리포터였다. 실은 해리포터 이외의 맥락에서는 '파수꾼'이라는 단어를 읽어볼 일도, 발음해볼 일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을 본 이후로는 며칠동안이나 이 말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파수꾼인지를 오래도록 곱씹어야만 했다.

  이 영화는 지금은 톱스타 반열에 오른 이제훈의 첫 장편영화이다. 영화는 여느 상업영화와는 달리 멋들어진 배경음악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핸드헬드 기법을 사용하여 카메라 워킹이 부드럽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이유는 다름아닌 인물들 사이의 역학관계와 그 관계를 그려내는 배우들의 연기에 있을 것이다.

  기태(이제훈)와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폐 역사에서 야구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친구사이이다. 영화는 이 친구 사이가 이미 일그러진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죽은 기태와 그런 아들의 죽음을 쫓는 기태의 아버지의 얼굴이 섬세하게 클로즈업되며 시작한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셋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디서부터 뒤틀린 것인지를 몰입하여 추측하게 한다.

  기태의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가 왜 장례식에 오지 않았는지,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묻고 싶다. 그러나 아무도 속 시원하게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저는 전학와서 잘 모르는 걸요, 다른 친구에게 연락해보세요, 따위의 말들이 전부이다. 그러나 관객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들이 진실을 숨기고 지키고자 하는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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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희준과 기태의 사이가 한 여학생을 좋아하면서부터 엇갈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인 세정이 기태에게 고백을 하면서부터 희준은 기태를 오해한다. 내가 좋아하는 거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따위의 거창하지 않은 자존심 싸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년기를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느껴본 적 있을 불안한 감정선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기태는 희준이 자신을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적극적으로 그 오해를 풀어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을 앞세워 희준을 하대하기 시작하고, 그 자존심 싸움이 결국 주먹 다짐으로 번져버린다.

  복도에서 멱살을 붙잡히고, 가방을 뺏기고, 기태 무리에게 뺨을 맞고 구타를 당한 희준은 기태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자존심을 굽혀 사과를 하고 다시 사이 좋게 지내보려는 기태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하단 말 쉽게 나오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사과받고 싶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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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진심으로 사과를 하면 당연히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기태는 희준의 반발에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황은 무마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기태의 괴롭힘을 참지 못한 희준은 전학을 결심하고, 기태에게 우리는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고 선언한다. 같이 다니면 뭐라도 되는 기분에 너와 어울려 다녔을 뿐이지, 너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이다.

  기태는 그런 희준과, 희준을 때린 자신을 책망하는 동윤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기태는 동윤의 여자친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고, 그 사실을 동윤에게도 전달하기에 이른다. 동윤이 자신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동윤의 여자친구가 자살 시도를 하고, 동윤은 희준과 비슷한 궤도에 올라선다. 기태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것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동윤은 기태를 철저히 외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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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기태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학교를 나오지 못한 동윤의 집에 찾아간다. 그러나 동윤은 중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기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길래 나를 이렇게 모른 척 하는거냐고 어색하게 묻는 기태에게, 동윤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한 마디를 던진다.


"처음부터 잘못된 거 없어.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동윤마저 자신을 떠나가려 하는 현실을 기태는 믿을 수 없다. 너까지 나한테 이러면 안돼, 라고 애처롭게 매달리는 기태에게 동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결국 기태는 동윤과 제대로 된 말도 해보지 못한 채 집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얼빠진 표정으로 혼자 앉아있던 기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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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하는 유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태와 희준, 동윤 모두 각자의 상처를 지키려 하는 파수꾼들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방법을 몰랐고, 결국 각자가 스스로 파멸하는 길로 걸어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신을 보호하려 했으며 타인에게 날을 세웠던 기태가 친구들에게 외면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한 순간에 무너져내렸다는 설정이 꽤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지키려 하는 '자존심'이 있다. 그리고 그 자존심의 끝을 집요하게 쫓으며 거칠게 담아낸 영화가 <파수꾼>이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살아있는 눈빛과 현실감있는 대사가 우리 주변에서, 혹은 내가 겪어본 일들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일게 만든다. 

  이 영화로 독립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이라는 제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수꾼’이라는 의미가 ‘지키는 자’, 또는 ‘진실을 추구하는 자’ 라는 의미가 있는데, 결론적으로는 그런 의미를 반어적으로 쓰고 싶었어요. 영화 안에서 어느 누구도 진실을 알지도, 진실을 얘기하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영화 안에서의 아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에게 상처를 주지만 어느 누구 도 본질적으로 자신을 지키지 못했죠."

  자신을 지키지 못한 유년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잔인하도록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가 또 있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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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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