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발굴 40주년 기념 특별전 <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

글 입력 2016.08.1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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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전시를 보고 왔다.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의 초대로 다녀왔는데, 짧은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방문했다. 특히 다른 전시에서보다도 외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 전시였던 것 같다. 확실히, 한국인들뿐만이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들에게까지도 많은 감회를 시사하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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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내부 사진촬영이 가능한 전시였는데, 일부 사진을 찍었지만, 그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기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자료로 사진을 갈음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을 대대적으로 전시하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신안해저선은 무엇인가? 사실 신안해저선 발견은 20~30대에게는 그다지 기억에 없는 70년대의 일이다. 1975년에 신안 앞바다에서 한 어부가 그물을 던져 도자기들을 건져올린 것을 신고하여, 이를 필두로 신안 앞바다에 수장된 유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약 9년에 거쳐 유물들을 건져올렸다고 한다.

신안앞바다는 갯벌로 인해 수중이 매우 흐리며 유속이 강하고 또 바닷물의 흐름이 자주 바뀌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 조류가 멈추는 시간이 하루에 10~1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9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신안해저선에 담겨 있던 옛 유물들을 건져올렸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건져올린 신안해저선은, '신안선'이라고 간단하게 이름붙여지긴 했지만 그 배는 중국의 경원(현재의 닝보)에서부터 일본의 하카타로 향하는 배였다. 선적된 화물들 역시 고려청자 약 7점(전시된 것 기준)을 제외하고는 중국이나 베트남산 화물들이 다수였다. 이를 고려한다면 중국이나 일본에 유물들을 넘겨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 신안해저선이 발견된 70년대 당시에는 국제법이 미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신안해저선을 중국이나 일본에 양도하는 바 없이 우리나라가 보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고려시대였던 무렵,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열도를 장악한 상태였고 중국에서는 송이 쇠하고 원이 강성해지던 시기였다. 송나라의 귀족적인 취향, 꽃이나 차 등 아름다운 것들을 여유롭게 즐기는 완상의 문화가 원에도 그대로 이어져 완상품들이 전시장에 많이 보였다. 또한 당시 유행했던 복고풍인 '방고동기(청동기 시대를 모방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활용으로 쓰였던 청동기들을 원 대에 와서는 모양을 모방하여 향로와 같이 제례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문화 발달이 늦었던 일본은 당시 원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수용하고, 또 고려의 미려한 청자들을 수입하여 즐기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박물관들에서 대여해 온 그림들, 문헌들이 함꼐 전시되어 있어 일본에서 귀족층들이 어떻게 문화를 향유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시대의 문화적 배경들이 유산이 되어 훗날 서양에 많은 영감을 주는 우키요에 같은 일본 특유의 문화들이 발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안해저선에서는 2만점이 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절대 다수가 도자기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방고동기의 유행도 엿볼 수 있었고, 중국의 청자가 고려의 청자와는 조금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대다수의 도자기들이 중국 저장성에 위치한 용천요라는 가마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 외에 다른 가마들에서 나온 도자기들도 아주 아름다웠다. 특히 흑유 도자기들은 지금 이 시대에 상품으로 나온다고 해도 바로 사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작은 우주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매력이 있었다.




전시를 보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만 여점이 넘는 저 수많은 유물들이 훼손되지 않고 무사히 전시될 수 있도록 한 손길들의 노력이었다. 바닷속에 아주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금속은 물론 도자기들도 일부 부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수중에 있었기에 말랑말랑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거기에다 해양생물들까지 얹혀 사는 상태에 하루에 10~15분밖에 수중탐색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어렵게 이것들을 건져올리고 또 복원해냈을까. 도자기들에 붙어 사는 굴이나 여타 생물들을 조심스럽게 제거하고, 다시 건조시키고 강화시키는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해냈다고 한다. 이 전시에 드러나지 않은, 그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 귀한 유물들이 오늘날 우리 앞에 그 자태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면, 전시된 작품들과 아래에 위치한 패찰이 바로 바로 매치될 수 있게 넘버링을 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점이다. 가끔은 패찰에 쓰인 이름과 전시된 작품 중 어느 것이 짝을 이루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전시의 내용과 더불어, 또 그 전시를 위해 수십년 간 노력한 수많은 손길들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까지 전부 완벽한 전시였다. 13~14세기 초 한중일 삼국의 문화 흐름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리다. 더군다나 청화백자가 나오기 직전 그 태동까지도 느껴볼 수 있는 전시이기 때문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한 번은 꼭 가봄직한 전시인 것 같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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