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읽는다는 것 [문화 전반]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글 입력 2016.07.06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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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시이다.
응앙응앙, 푹푹, 계속 곱씹으며 음미하게 되는 아름다운 시어.
그리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눈 앞에 휘몰아치는 눈과 함께 흰 당나귀가 아른거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밤눈길002.jpg
 

고등학교 3학년,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드는 벅차오르는 감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동안 얼마나 기계적으로 시의 주제와 시어의 의미 등을 암기해왔는지를 상기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어떤 시를 읽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시간 낭비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을까.
그저 이 시는 어떤 부분이 시험에 나오는지, 모의고사에는 몇 번 출제되었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했다.

시를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시를 암기하고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학창시절에 시를 암기용으로만 접해서일지, 왜 시가 아름답다는 건지 이해가 안간다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이전처럼 공부 목적으로 분석적인 태도로 시를 읽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시를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시를 온전히 느끼려면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고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어의 효과가 어떻든, 시대적 배경이 어떻든, 그런 교과서적인 지식에서 다 떠나서
온전히 그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시를 읽으면 가슴이 간질간질해지거나, 꽉 막힌 듯 답답해지거나, 어떤 감정이든 느낄 수 있다.
정답은 없다. 그저 그 순간의 내 감정에 충실해서 시를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시를 읽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한 마디 한 마디 깊은 울림을 가진 시를 소개한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이 시구를 계속해서 음미하게 될 것이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김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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