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연극 진홍빛소녀

글 입력 2016.05.0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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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밤>에 이어 두 번째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동숭동으로 향했다. 저녁 8시 공연인 <진홍빛소녀>를 보기 위해 동숭아트센터 꼭두소극장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청량한 저녁 공기와 은은하게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진홍빛소녀>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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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전. 그리고 불이 켜졌을 때 전형적인 대학 교수의 모습을 한 이혁이 눈앞에 서있었다. 그는 관객을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강의를 펼치며 극의 시작을 알렸다. 강의는 사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배우는 옷차림, 말투, 몸짓을 통해 이혁이라는 젠틀하고, 여유가 넘치는 젊은 대학 교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나는 그것에 매료되어 연극에 충분히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빠져들어 버린 세상은, 내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진홍빛 소녀>는 일반적으로 접해왔던 스토리처럼 선악의 구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 경계는 매우 명확했다. 은진은 17년 전 고아원에 불을 질러 51명의 사상자를 낸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감자이고, 이혁은 선량한 시민이자 피아니스트 아내를 둔 평범한 대학 교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그 경계는 흐릿해지다 못해 종래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은진은 이혁의 아이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가지고 새벽 4시까지 자신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하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17년 전 고아원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범죄들과 방화사건, 그리고 은진과 이혁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점차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은진은 이혁에게 묻는다. 과연 이혁은 고아원 사람들이 은진에게 행했던 추악한 행위들을 몰랐는지, 알았다면 왜 도와주지 않았는지, 고아원 방화사건이 정말 은진 혼자만의 잘못이었는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는지,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연극이 흘러감에따라 너무나도 명백했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은 점점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인간의 추악한 면들, 그리고 그 추악함에 대한 동조 혹은 방관만이 남게 되는 모습을 보았다. 누가 선하고 악하며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가? 극 속에서는 이미 그런 것들을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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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연극은 끝이 났다. 하지만 내 머릿속 <진홍빛 소녀>는 여전히 상연 중이었다. 이혁이 답하지 못했던 질문의 칼날이 이제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게 뭘까?”
   

 결국 나는 감히 스스로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세상에 미련도, 잃을 것도 없는 은진이 이혁에게서 얻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일종의 방관자였던 이혁의 뉘우침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했고, 믿었던 이혁이 은진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를 조금이라도 그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마치 그 때의 일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이혁이 멀쩡히 살아가는 것이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은진은 ‘방관’이라는 행위가 가해만큼이나 피해자의 내면을 끔찍한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혁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은진이 계속해서 던졌던 그 질문, 그것이 결국 <진홍빛 소녀>가 우리에게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당신이 모르는 척 방관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 당신은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느냐고. 조금이라도 미안해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듯 했다.
 
 
 은진과 이혁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흡입력, 그리고 극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간에 대한 고민.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극의 말미에 가서는 우리에게 질문을 툭 던져놓는 <진홍빛 소녀>. 어느 영화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좋은 영화는 그것이 끝이 난 뒤에도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남김으로써 다시 시작하는 영화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홍빛 소녀> 나에게 충분히, 그리고 너무나도 훌륭한 연극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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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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