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연극 <치정>을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 만드는 힘은?[공연예술]

[공연] 연극 치정 - 포스트드라마적 관점에서
글 입력 2016.02.2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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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치정>을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 만드는 힘은?  

  [공연] 연극 치정 - 포스트드라마적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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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단체 그린피그가 남산 예술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치정>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일어났던 몇 몇 사건들과 이를 토대로 한 여러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여 치정, 정치, 폭력이라는 주제를 두루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문제 의식을 뚜렷하게 풀어내는 박상현 작가에 의해 탄생했고 그린피그 연극단이 공연하고 있다. 연극계에서는 일명 ‘악동’이라고 불리우는 윤한솔 연출가와 함께 ‘불온한 상상력’을 추구하는 극단 그린피그를 이끄는 박상현 작가는, 연출 작업과 더불어서 구조적 글쓰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고 있는 극작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박 작가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여러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구조, 또는 한 개의 질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쓰곤 하는데 이러한 박 작가의 글쓰기 특징은 이번 신작 연극 <치정>에서도 극명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파편적 글쓰기, 병렬적 구조는 ‘포스트 드라마 연극’의 가장 중요하고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연극<치정>은 파편적인 이야기들의 병렬적 구조뿐만 아니라, 춤, 통시성 등 몇 가지의 포스트 드라마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레포트에서는 연극<치정>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이러한 포스트 드라마적 요소들을 분석해봄으로써 이 작품이 포스트 드라마 연극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해보고자 한다.

 


공연이 열리는 남산 예술 센터는 그 동안 보아왔던 그 어느 공연장보다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실내 소극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노천극장을 연상케 하는, 반원형의 무대와 상당한 단차의 계단식 좌석까지. 일반적으로, 무대가 관객들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관객이 배우와 극을 자리에 앉아 올려다보곤 하는 여느 연극 공연들과는 차별화 되는 점이 분명 있었다.

   

연극 <치정>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그러한 독특한 무대에서 배우들이 선보이는 화려한 춤사위였다.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관객들을 맞아주는 것은 배우들의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현란한 사교댄스와 밴드의 신나는 라이브 밴드의 연주이다. 본 공연이 시작하기 전, 모든 배우들이 마치 운동장, 혹은 댄스 교습소 같은 무대 위에서 남녀 짝을 이루고 라이브 밴드 공연에 맞추어 춤을 춘다. 십오 분 전에 입장한 관객들이 보통 어두컴컴한 무대를 제쳐두고 동행인과 잡담을 하면서 보내는 그 시간을, 연극<치정>은 즐거움과 흥겨움으로 가득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춤’이라는 것은 단순한 흥미 유발 또는 지루함 타파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춤’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 신체의 현존이 자아내는 아우라는 포스트 드라마 연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 전반에 걸쳐서 ‘춤’이란 매우 중요한 메타포로 쓰이고 있다. 연극<치정>에서 춤의 중요성은 작가가 직접 강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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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영어 제목이 인데, 여기서 춤은 제목의 패션(열정), 섹스의 대용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학적으로 공부한 바는 없지만, 사교춤이라는 게 예전에도 외간 남녀의 접촉에 대한 공적인 창구이자 성행위의 대리 행위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절화 된 치정의 형태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서 춤은 무대 위에서 치정을 구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볼 수 있겠죠.”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 드라마적 연극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연극<치정> 속에서 배우들이 선사하는 익살스럽고 에너지 넘치는 춤은 포스트 드라마가 몸을 다루는 방식과 연결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경우, 신체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곤 하는데 여기서 신체는 의미의 전달 수단이 아닌 그 물리적 육체와, ‘춤’이라는 동작을 통해 연극의 중심이 된다. 또한 포스트 드라마 연극에서는 의미보다는 에너지의 표출이 우선하게 되는데, 의미의 구현을 묘사해내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묘사하는 가운데 인간의 제스처 자체가 부각된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해 줄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춤이라는 것이다. 연극<치정> 속에서 실제로 연기한 배우들 또한, 제작일지에서 춤을 “우리 작품의 중요 포인트!”라고 말하며 작품 안에서 그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포스트 드라마적 연극에서 춤이 드러내는 몸의 긴장은 드라마 연극에서 드라마 자체가 주는 긴장을 대체한다. ‘춤’이란 숨겨진 에너지를 표출하는 가운데 충동에 대하여 관객들과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춤’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치정>이란 어떤 것 일까? 사실 <치정>이라는 제목은 아주 도발적이고, 어떻게 보면 선정적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커다란 세 가지 주제는 치정, 정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치정’과 ‘정치’는 음절의 순서만 바꾸면 서로의 단어로 읽힌다는 재미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치정’을 거꾸로 하면 ‘정치’가 된다는 의도적인 말장난으로 주제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연극<치정>의 제목은 ‘정치’라는 단어의 음절을 전도시킴으로써 치정 : 잘못된 만남, 불륜, 사랑의 죄악의 이면에 숨어있는 정치, 즉 숨겨진 권력을 고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익살스러운 언어유희는 이 극의 재미를 한층 더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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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욱 시인의 <하여지향>을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구절을 발견 할 수 있다.

 

치정(癡情) 같은 정치(政治)가……

현금(現金)이 실현(實現)하는 현실(現實) 앞에서

다다른 낭떠러지!

 

송욱 시인 또한 이 작품에서 어휘의 전도나 동음이의어의 나열을 통해 현실을 꼬집고 있다.

 

실제로 연극<치정>의 작가 박상현은 이 시에서 그 영감을 얻었고,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극의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살인 사건들을 모으다 보니 남녀간의 치정에 연관된 살인사건이 많음을 발견했고 또한 반대로 모든 치정 뒤에는 정치적인 관계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그러나 여기서 정치란 흔히 생각하는, 국회에서 하는 정치를 뜻한다기보다는 인간의 권력의 관계를 총칭하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치정을 극한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부의 차이, 권력의 차이, 지위나 인종의 차이 등 일종의 권력관계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인간관계를 파탄으로 이끄는지 한번 그려보고 싶었다”고 박상현 작가는 말한다. 제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휘들 간의 뒤바꿈은 단지 기표적인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놀이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윤리적으로 불건전하며, 사회적으로 위험한 사랑을 지시하는 ‘치정’이라는 단어 내에 담겨 있는 ‘정치성’을 드러내고 발견해내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권력이 취하는 입장과 다른 입장을 단번에 ‘비윤리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폭력을 문제 삼고 있기도 하다. 작가 박상현은 이 제목을 지으면서, 관객들이 이러한 어휘전도를 알아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날카롭고 예리한 관객은 과연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 궁금하다.

 

<치정>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포스트 드라마적 특징은 전체적인 스토리가 뚜렷한 줄거리 없이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이 유기적이지 않은 순서와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그 각각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그 종합을 통해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에서 포스트 드라마의 한 예시로 볼 수 있는 특징이 충분하다. 이런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극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작가는 구조주의적인이야기 방식이 현식을 직시하고 현실에 대해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게 만드는 효과적인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구조’라는 것이 줄거리의 논리적인 연결과도 관련될 수 있지만, 이미지나 기호, 또는 언어 등 요소들의 분포와 배열 방식에서도 그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 <치정> 또한 논리적으로 구조화되거나 시간순서로 배열된 사건의 진행이 아닌 마치 콜라주나 몽타주 같은, 독립된 조각들을 모아 한 데 결합한 듯 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치정>의 박상현 작가는 그가 아니면 다른 어느 누구도 펼쳐 보일 수 없는 세계를 무대 위에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독창적이면서도, 그러나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현실 속 이야기에 그 토대를 두고 있고, 연극 <치정> 또한 극 속에 등장하는 사건, 인물들 중 몇 가지는 실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극단적인 몇 가지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다음 정보들은 극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체적인 극을 구성하는 몇 가지의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자.

 


<정비석과 황산덕의 ‘자유부인’ 논쟁>

작품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여, 극의 시작을 열고 있는 사건이다. 친일경찰 노덕술을 모티프로 했다고 보여지는 작중인물인 남덕술 서울시경 수사부장이 신문에 연재된 소설을 읽고 있다. ‘자유부인’은 정비석 작가가 1950년대 중반에 서울 신문에 연재한 연재소설이다. 이 소설은 70회 정도를 넘어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선풍적인 인기는 신문사나 작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기였다.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그 상황에서, 지식인층을 대표하는 직업인 대학교수의 아내가 사교춤을 배우면서 대학생과 외도를 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당시 사회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킨다. 소설 속에서 그녀의 가정은 파탄의 위기에 놓이게 되지만 남편의 넓은 아량과 용서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 소재 자체가 당시 사회상 아래에서는 매우 파격적이었으며 그래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이에 서울대학교 법학교수로 재직하던 황산덕 교수가 신문에 ‘소설 <자유부인>은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고를 하면서 뜨거운 논쟁의 포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정비석 작가가 다시 반박하는 글을 게재함으로써 둘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정 작가는 서울신문에 ‘교수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흥분한다’고며 반박글을 썼고, 다시 황교수는 ‘문화의 적, 문학 파괴자,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오히려 소설의 인기를 더 심화시켰다. 소설 <자유부인>은 당시 매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춤바람’이란 말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당시 대구와 부산에서는 춤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그로 인해 가정 파탄에 이런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춤’이라는 소재를 연결고리로 하여 자유부인 논쟁 사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박인수 사건이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시기였던 1950년대 중반 대한민국 현역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한 박인수가 70여명의 여성들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가졌던 성 추문 사건을 말한다. 그 중 대부분은 사건에 연루된 여성들 중 69명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피해자라 주장하였으나 쌍방 합의에 의한 간통으로 드러났으며, 이 중 1명의 여성만이 처녀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전통을 중시하고 여성의 정절이 강조되었던 과거의 1959년대 우리 사회에 큰 파문과 충격을 가져왔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권순영 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명언을 남기며 박인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희와 란의 살인> - 인천 제자 살인 사건

인천 교생 살인사건은 지난 2012년 5월 강릉 모 대학 사범대생 이 모씨가 16살 제자 권 군과 인연을 맺은 뒤 약 두 달 만에 교제를 시작했고, 성관계까지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 씨는 권 군과의 교제 사실이 들킬까 두려워 권 군을 고교 자퇴를 시킨 후 자신의 인천 원룸으로 데려왔고, 함께 교생실습을 나갔던 이정아(가명)씨와 같이 권 군을 검정고시에 합격시키기 위해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권 군의 몸에 뜨거운 물을 붓는가 하면 골프채 등으로 권 군을 폭행하기 시작했고. 사흘 뒤 권 군을 전신감염에 의한 패혈증 등으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의 이면에는, 여자들의 질투와 남녀 사이의 애정문제가 뒤섞여 있었다고 한다. 얽히고 설킨 치정관계가 부른 비극으로 볼 수 있다.

 

<안산역 시체 가방> - 안산 쑨 씨 사건

안산 쑨 씨 사건은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 사건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한 중국 불법 체류자가 한 때 연인 사이 였던 정 모 씨를 살해하고 유기한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 쑨 씨는 피해자 소유의 핸드백과 980만원 상당이 예치 돼 있는 예금통장 4개에서 현금을 모두 인출하여 도망 다니다가, 범행 8일 만에 경찰에 붙잡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여자랑 싸우다가 여자가 죽으니까... 죄송합니다.”라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시인했다. 10년 전 입국해 불법 체류를 해오던 쑨 씨는 한 때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정 씨와 지난 2년간 연인 관계로 지냈으나, 최근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러 중국을 다녀온 사건으로 매우 화가 나 있었고 범행 당일 또 다른 남성을 집에서 만나는 모습을 보자 화를 참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둘 사이에 큰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만취 상태였던 쑨 씨는 정 씨를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한 후 시신을 토막내어 안산역 등지에 유기한다. 범죄를 시인한 그는, 그러나,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골목길 옆 땅 속에 묻었다던 나머지 시신 일부를 찾아내지 못했다.

 

<삼각관계 살인사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에 있던 두 명의 20대 남성이 강남구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른 아침 칼부림을 벌였다. A씨의 전 남자친구인 박 모씨, 현 남자친구인 조 모씨가 그 사건의 당사자로, 사건 당일 박 씨는 회사 동료와 회식 후 집에 갔다가 조 씨 등의 일행과 술을 마시고 있던 A씨를 불러내었다. 밖에서 한 시간 정도 대화 한 후 박 씨는 조 씨를 불러내었고, 인근 교회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범행의 현장인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이후 학교 밖에서 “살려달라”는 고함소리를 들은 행인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게 된다. 사건 현장에서는 인근 식당에서 박 씨가 훔친 4자루의 칼이 발견되었고 그 중 2점에 육안으로 보이는 혈흔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건 초반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 사건은 서로간의 칼부림이 아닌 박 씨 혼자 조 씨를 찌르고 자해까지 한 사건이었음이 추후 밝혀졌다. 박 씨는 “조 씨를 찌른 후 나도 죽어야겠다싶어 오른쪽 허벅지를 찔렀다”고 진술했다. 흉기에 찔린 조 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박 씨도 허벅지를 찔려 크게 다쳤다. 하지만 박 씨는 수술 후 목숨을 건졌다.

 

 

연극 <치정>에 등장하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통합의 거부’라는 포스트 드라마의 특징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여러 개의 이야기들은 모두 파편적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전체 작품의 일관성이나 완결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기능할 수 있다. 이는 전체 작품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통합성보다는 그 대신 하나의 이야기가 불러오는 강렬한 순간적 밀도를 더 중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수용자로 존재하는 관객들 또한 집합적 경험보다는 개별적 경험을 얻는 체험을 한다.

 

특히,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기 전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에 <에버랜드 호랑이>를 비롯한 두 세 개의 막간극이 끼어든다. 연출자는 잠시 쉬어가자는 의도에서 이를 끼워 넣었다고 하는데, 이는 작품 전체의 테마 속에서 일종의 작은 변주이자 중간 징검다리가 되는 부분인 것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사사로운 살인 사건들인데, 이 사건들에 개입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선생과 제자, 외국인 불법 체류자와 내국민, 먹이를 두고 싸우는 암호랑이와 수호랑이 등 모두 일종의 권력관계가 배후에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막간극들의 등장은 작품의 논리, 유기적 짜임새를 더욱 흐트러뜨리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전체적인 작품이 파편적인 조각들의 함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하는 막간극들이 추가되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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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이야기들 간에 유기적 배열이나 위계질서가 없는 병렬적 구조는, 배우들 간의 역할 분담에도 적용된다. 대부분의 연극들은 주연, 조연 등으로 역할이 나누어지고, 그에 따라 대사의 양, 등장하는 장면의 빈도 그리고 스토리 전개에 기여하는 정도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연극은 13명의 배우들이 40개 이상의 배역을 소화하면서 다함께 무대를 장악한다. 필자 또한 처음에 포스터를 보았을 때, 여기에 단독으로 등장하는 황미영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라고 기대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황미영 또한 극 안에서 특별히 더 비중 있거나 많은 연기를 맡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기존의 전통 연극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연극 <치정> 속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요소는 경계가 허물어진 객석과 무대를 통해 관객 모두가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목격자가 되는 신선한 경험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필자는 입장 전 로비에 부착된 안내문에 주목했었다. 극장 측에서 관객들에게, 공연 도중 등장하는 흡연 장면에 대해서 특별히 안내를 하는 공고문이었다. 유사 흡연 행위가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어 경고하는 문구일 거라고 단순하게 판단했다. 그러나 공연 후반부, 한 배우가 무대에 담배를 들고 나와 라이터로 직접 불을 붙여 실제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매우 신선하면서도, 공연장에 자욱히 퍼지는 담배 냄새는 충격적이기도 하였다. 일부 관객들은 그 진한 냄새와 매캐한 연기에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러한 연출을 시도한 연출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아마 관객들이 그 장면의 냄새를 직접 자신의 후각을 통해 느낌으로써 극 중 상황에 동화되고, 실제로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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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연극<치정>은 매우 파편적이며 각각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유부인 논쟁을 통해서는 노덕술 같은 친일세력이 한국 정부에 잔존해서 경찰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해방 직후 사회의 단면을 나타낸다.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해운대 살인사건은 남녀 간의 감정과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를 다루고도 있다. 이렇게 각각의 주제를 전달하고 이야기들 사이에 어떠한 인과율적인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모두 치정 뒤에 도사리는 정치라는 테마를 반복, 변주해서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에 세상을 들썩이게 한 정비석 작가의 자유부인에서부터 이어져온 춤의 계보의 역사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현대 조폭사까지 내려온 폭력에 얽힌 이야기들은 따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모두 치정과 폭력으로 일그러진 권력 관계를 보여주며 우리 사회의 단면을 우화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는 변했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여전히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방식의 무대화, 그리고 기존 연극의 기초를 완전히 흔드는 구성 방식, 복잡한 상징들은 다소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기억될 만한 연극이었다. 

[안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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