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떠나야 하는 겨울의 운동장 레인 위에서, [사람]

글 입력 2024.02.1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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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지상의 시린 겨울날을 녹일 천사 같은 봄이 온다.

 

봄은 늘 어색하고 간지럽다. 너무 짧은 계절이기도 하고 봄은 다시 모든 생명들이 깨어나 새로이 출발을 많이 하는 계절이기에 봄은 부끄럽다. 공기도 기분도. 그리고 지금 난 겨울의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 둔 채 돌고 있다. 이 긴 운동장 같은 겨울의 한 바퀴를 돌고 나면, 그제야 나의 겨울도 끝나겠지.

 

근데 속도가 나질 않는다. 떠나는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새로이 출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스민다. 얼마 뛰지도 못하고 괜히 뒤로도 갔다가 그 자리에 머물러도 본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재는 과거가 되어갔다. 시간은 자비 없이 흘러가니까. 나는 과거에 머물러 겨울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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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늘 사람을 그리게 만든다.

 

그렇게 떠나 홀로 정착했을 때의 한동안의 공허함과 과거를 그리는 마음.

 

이건 누군가 내 곁을 떠났을 때도, 부모님을 떠나 혼자 서울에 살게 되었을 때도, 보고 싶은 누군가를 어쩔 수 없이 두고 내려와야 할 때도 다시 쉼을 끝으로 새 출발을 하기 위한 레인 위에 서 있을 때도. 모든 떠나는 순간들은 묘한 기분이 든다. 어디로 갈지 모를 불완전한 20대의 중반에서 다시 또 다음 레인의 새로운 나를 기다린다.

 

늘 떠나왔다. 아니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떠밀려 온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얀색으로 잘 그어진 일정한 선을 따라 다른 사람들의 레인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앞만 봤고, 그저 잘 달리고 있다는 칭찬이 좋았다. 확고한 꿈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꿈을 위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새로운 만남과 아쉬운 이별을 매번 맞이했고, 교과목이 아닌 삶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인간관계와 앞으로의 적성은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도 많이 배웠다. 작은 한 동네에서 자라 오랜 시간같이 큰 친구들은 어느새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확고한 꿈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10대는, 유화 같던 나의 꿈들은 그냥 그림일 뿐이었다. 만들어야 해서 생각하고 그린 꿈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또 떠났다. 이젠 오랜 시간 함께 우정을 나누고 웃던 밝은 친구들과의 이별을 뒤로 부모님 곁을 떠나 청주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내가 다음 레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혼자 살아야 하는 다음 레인의 나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려웠다. 그 시기에 바이러스 팬데믹까지 겹치며, 몇 년 동안 세상은 동결되었다. 나는 다음 내게 바통을 넘기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주자인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생각보다 내가 꿈꿔왔던 것들이 나랑 맞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바꾸고 싶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해 바꾸지 않았다. 당연히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나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걸 나의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하며 그 레인을 떠났다. 생각하던 대로 되지 않아 길을 벗어나 어딘지도 모르는 길에서 방황했다. 그러다 학교를 결국 쉬게 되었고, 우연히 내가 쓴 글에서 사라진 나를 찾았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내게 다시 바통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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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지친 영혼을 끌어내며 살기도 외로움에 사무쳐 지내기도 했지만, 혼자 잘 지내는 법에 대해 배우고 나를 아끼는 법에 대해 배웠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조금은 알아갔다. 23살이 돼서 나는 나를 알아가고 싶어졌다. 취향도 주관도 뚜렷하지 않은 그저 가야 해서 가는 길을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색과 그림을 조금씩 따라 담아내며 그려갔었는데, 이젠 내가 좋아하는 물감의 색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그림체는 어떤 것인지 그저 나만의 세상에서 느리더라도 천천히 그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앞만 보고 다음 주자인 나에게 질주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조금씩 오려 만들어졌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배우는 것이 좋다. 처음엔 그게 모방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투가 좋아서 그 말투를 배워보고 누군가의 취향이 좋아서 나도 그 취향을 향유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분위기가 좋아서 나도 그런 분위기를 동경했고 그러다 보니 그게 나를 찾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런 좋은 영향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 같다. 그 영향은 대게 주변 지인들과 책에서 많이 받은 것 같다.

 

23년은 그랬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나를 찾아 행복했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했고, 모든 삶의 균형이 잘 잡혀가서 행복했다. 그래서 좋았던 23년을 떠나보내기가 어려웠다. 24년이 다시 시작이 되면 나는 다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해야 하니까. 다시 복학을 해서 공부를 하고, 졸업을 위해 다시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취업을 위해 준비하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파악도 되지 않은 채, 또 뛰게 될 나에게 바통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또 멈췄다.

 

24년이 사실 그렇게 반갑지는 않다. 부담스럽기도 하다. 대학교에서의 4년이라는 세월은 금방 가버린다. 또 금방 지나가겠지 모든 건. 나는 언제까지나 커서 뭐가 될지 모르겠다. 다 커버린 것 같지만. 근데 현재 이 부분에서의 내 생각은 뭘 할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하다 보면 뭐라도 돼있을 거라 생각한다. 꿈을 좇아 뛰다 보니 가속이 붙어 멈추지 못했고, 많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어린 때가 아쉽다. 그래서 이젠 과거에게도 미래에게도 많은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현재 내가 놓여있는 이 길고 둥근 레인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과거를 붙잡아 봤자 그것은 회상일 뿐이고 바꿀 수 없다. 미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오지도 않은 불안을 예상하는 것은 현재의 나를 복잡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은 예측대로 돌아가지도 않을뿐더러 늘 변수는 존재한다. 그러니 그냥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저 최선을 다해, 내 속도대로 지치지 않게 다음 나를 바라보며 살아야겠다. 부담스러운 24년을 나는 어떻게 보내게 될까. 나는 언제쯤 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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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4년의 봄이 서서히 온다. 나는 겨울의 마지막 레인 앞에서 작은 새싹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럼 나는 더 이상 차갑고 거친 흙을 지닌 운동장 레인이 아닌 잔디와 봄비를 맞은 부드러운 흙 속에서 핀 들꽃들과 함께 걸을 날이 오겠지.

 

24년의 불완전한 내가,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기다리며 씀.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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