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 애쓴 말하기 [문학]

글 입력 2015.06.1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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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애쓴 말하기

'세상에서 우주를 품을 수 있는 건 시 뿐이다.'


신유정(ART Insight 서포터즈 4기)


시를 쓴다는 건 어쨌든 일상적 언어활동보다는 뭔가 애쓴 말하기다.

시라는 게 누군가가 심혈을 기울여 애써서 뭔가를 한 거다. 
그럴 때면 무언가 있을 법한 거라.

누군가 몹시 사무쳐서 해놓은 거.


주간지 시사인 인터뷰에서 김사인 시인이 한 말이다. 
시를 한번 쯤 읽어 본 사람들은 그의 말에서 시를 추억할 수 있다.
시란 그렇다. 시에는 무게가 있다.
‘너를 사랑한다’ 이 간결한 한 마디를

짝사랑, 김기만
우연히 마주치고 싶은 사람이 있다네.
환한 봄날 꽃길을 거닐다가
플라타너스 그늘 길을 따라 걷다가
은행잎 떨어지는 아스팔트를 밟다가
겨울비 오시는 하늘 아래에서도
스쳐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네.
그저 온종일 기다려도 좋을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네.

애써 말한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소설이 세상이라는 상자 속에 담긴 유리구슬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는 것이라면, 시는 그 상자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는 추상적인 개념을 우리 눈에 보이는 단어들로 표현해낸다.

나는 몇 십분, 몇 시간 혹은 하루, 많게는 평생에 걸쳐 쓰다듬어 볼 수 있는 시들을 좋아한다.
네 편을 준비했다. 어렵더라도 시간을 가지고 오래 간직해볼 수 있는 시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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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김경주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고대 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 가고 있다
귀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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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꼴리 호두파이/ 황병승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 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리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 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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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장례식/ 황병승

 장례식이 몇 시 였지요 곧 가야 해요 겟 백 겟 백 미치겠군 그 노래 좀 꺼주시겠어요 유리창의 무늬라도 가져갈래요 어쨋든 오 년 넘게 이 방에서 당신과 뒹굴었으니 시간이 흐른 뒤, 저 삐뚤삐뚤한 무늬들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만 죽고 싶겠죠 두 시라고 했나요 그래요 그 손 좀 치워요 당신은 나를 한시도 내버려두지 않는군요

 항상 부르는 사람 방문을 열 줄만 알았지 닫을 줄 모르는 사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내 눈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데 나는 여자예요 때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작은 불을 켜고 한 계단 한 계단, 눈썹이 참 짙군요 당신 아 당신 듣기 좋은 멜로디예요 귀를 자를까요 자르겠어요 꿈이겠죠 너무 멀리 가지 말아요 물고기는 싫어요 기르기 힘들죠 당신을 핥고 싶군요 개처럼 곧 이별이겠죠 그전에 당신을 떠날까 봐요 아니 떠나지 않겠어요 입술이 차갑군요 당신 참 무서운 사람이에요 사랑할까요 사랑할래요 당신 차라리 죽어버려요 아니 제발 죽지 말아요, 계단을 내려서든 더 많은 혼잣말을 통해서만 계단 끝의 당신에게로 가는, 그래요 나는 상처투성이 여자 좀 까다로운 여자입니다

 항상 부르는 사람 노크를 멈출 줄 모르는 사람아 그 소리가 나를 당신으로부터 쿵쿵쿵 밀어내는데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아니 나는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보세요, 저 거울 속 처음으로 나의 시선이 입술이 어깨가 입체적으로 느껴지는군요 이렇게 죽은 뒤에야…… 그 손 좀 치우라고 했어요 그리고 저 시끄러운 노래 좀 아아 이러다 정말 늦겠어요 텅 빈 관을 보면 나의 부모들이 얼마나 속상할까 얼마나 지랄할까요 너는 죽어서도 싸돌아다니냐! 미치겠군 내 속옷 어디 있죠 아니 됐어요 웃지 말아요 나쁜 사람 안녕 안녕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그렇게는 안 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항상 떼쓰는 사람 이제 다른 시간이에요 당신의 붉은 뺨이 무서워요 새 사람을 만나세요 그만 그만해요 난 죽은 년이잖아요! 단 한 번뿐인 날이에요 날 잊기 위해서 모두들 몰려올 거라구요 몰라요 더 이상 날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요 가야겠어요 자신의 장례식에 늦는 천치가 또 있을까 제발 그 노래 좀…… 늦었어 아아 늦어버렸다고요 겟 백 겟 백? 재수 없는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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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 이이체
―읽을 수 없으므로, 나는 이 경전을 지운다

손과 바닥,
땅으로부터 조금 내려앉은 그 반지하 방에는
달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피가 통하지 않는 발가락(들)
하얗게 질려서
너와 나는 입김으로 서로를
허옇게 데워주곤 했다

말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이게 더 좋지

불이 꺼진 그 방에서 지금은
네 다리에 매달리지 못하고 내 다리를 끌어안는다

뜯어지면 계속 뜯어서 수정하던 입술
미숙아처럼 작고 자신감 없던 그 손짓을 기억해서

메마른 손금
그늘이 드리운 곳에 사랑의 원색적인 흔적(들)

다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달빛이 차갑게 차오르고
속에서 앓다 뱉는 쓴 외마디(들)

쓰라리지만 계속해서 너를 읽게 될 거야
아무도 시작하지 않는 이 그림자를

말 없는 앵무새

이불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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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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