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케빈 카터에 대하여 [시각예술]

글 입력 2015.01.13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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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사진가 케빈 카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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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주저앉은 앙상한 팔다리의 아이와 아이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독수리의 대비가 인상적인 이 사진으로 케빈 카터는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과 함께 사진보다 아이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는, 보도사진과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을 것이다. 실제로 사진이 뉴욕 타임스에 실린 이후 케빈은 많은 질문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케빈이 소녀가 100m 앞에 있는 배식소에 도착한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이후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이유로 생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케빈을 비난했다.

우리 눈에는 아이를 노리는 독수리가 있고, 그걸 찍은 사진만이 보일뿐
사진의 배경인 수단의 아요드는 당시 출입이 통제된 곳으로 전염병을 우려해 외부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고, 케빈은 식량 배급 시간인 30분 동안만 머무를 수 있었다. 그래서 케빈은 저 작은 아이가 배식을 받기 위해 기다시피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몇 걸음 걷다가 지쳐서 주저앉고, 무릎을 짚고 일어나 다시 걷는 모든 모습을 지켜봤다. 살아있는 것은 먹지 않는 독수리가 가만히 멈춰 있는 아이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저 장면도 말이다. 

케빈과 함께 수단에 갔던 실바는 일본 저널리스트 아키오 후지와라와의 대담에서 부모가 배식을 받기 위해 아이를 내버려 둔 상태였고, 독수리가 아이 곁에 내려앉았고 케빈이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독수리를 쫓았다고 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케빈은 하나님을 찾으며 울었다고 한다. 저 광경을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긴 케빈은 인도적이지 못한 사람일까?

보도 사진가의 사명감과 그늘
케빈은 제대 후 신문사에서 일할 당시 네크리스 처형 장면을 촬영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에 충격을 받고,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는 데서 자신이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그 일이 형편없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케빈과 활동했던 동료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수단의 철자를 알고 있는 게 케빈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세상엔 누군가는 목격했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가 ‘굶주린 아이가 힘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자 독수리가 잡아먹을 듯이 쳐다봤다.’ 고 했으면 사람들은 수단의 상황에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런 말을 했다면 뉴욕 타임스에 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그 장면을 촬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단에 주목했고 구호물자를 보냈다. 그는 누구보다도 효과적으로 수단의 상황을 알렸다.


덧. 사람들이 케빈을 비인도적인 사진가로 오해를 했고, 그 오해는 케빈이 죄책감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했다는 또 다른 오해를 낳았다. 케빈은 수상 이후로도 여전히 가난한 보도 사진가였고 그의 우울증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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