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흐뭇한 시절의 공간 [공간]

친애하는 나의 공간에게
글 입력 2024.04.1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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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기억 속, 공간이란 꽃들은 여전히 선명합니다. 그 꽃들은 처음으로 세상을 기억하는 곳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고, 꿈과 희망이 자라는 곳에서 지금도 저를 지켜주고 있어요. 그 공간은 우리의 성장과 함께하며,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았죠. 지칠 때마다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그곳들을, 언젠가 글로 풀어내겠다고 무색한 다짐을 하곤 했는데 이제 실행에 옮겨 볼까 합니다.

 

 

 

1. 안녕 나의 유년, 공천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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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문화가 되어준 시절 공간은 기억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수 벽돌을 날라 지었다는 그 집을 저는 공천포집이라 부릅니다. 나무 냄새가 풍기는 바닥, 오래된 시간만큼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천장, 제주도의 특징인 돌담들과 미끄럼틀처럼 나 있는 계단 난간, 시골집에서나 볼 수 있는 특유의 유리문, 바다가 보이던 옥상까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디 하나 안 좋았던 공간이 없었죠.

 

지금 이맘때면, 풀벌레 소리가 화단에서 들리겠구나. 복실이가 나를 반기며 짖겠구나. 내 발걸음에 센서등이 반짝 빛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맞이하려 달려 나오시겠구나.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하죠. 때 되면 댕-하며 울리던 괘종시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시간을 알리고 있을까, 이런 사소한 것들이 뭉게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라,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안타깝게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공천포집은 현재 남아있지 않아요. 시의 개발로 철거 통보를 받아 반이 깎여 나갔고, 결국에는 전체가 철거되었거든요. 저는 울며불며 반쪽이면 안온한 거실과 안방을, 작은 쪽방과 나의 옥상을 지킬 수 있다며 집을 살려 두길 원했지만, 그게 어디 쉽나요. 당연히 집은 전체가 철거되었고, 반쪽짜리 감귤밭과 창고로 나 있는 길목만 간신히 살아남았죠.

 

나의 가장 좋은 기억의 한 페이지가 갑자기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면 저는 추억으로 묻어두었을 겁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던 중, 누구의 기록인지 모를 옛집의 필름 사진을 발견했고, 저는 얼른 이 사진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저의 기억이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쁘던지 모릅니다.

 

 

 

2. 바쁜 일상 속 편안한 휴식시간, 돌고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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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를 갓 벗어난 저는, 집과 학교를 벗어나 단 한시간만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보통의 대학생들이 캠퍼스의 낭만을 꿈꿀 때, 저와 친구들은 불안과 힘겨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거든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공간이 필요했고, 그때 처음으로 찾아낸 곳이 바로 집 근처 작은 카페 <돌고래 시간>이었어요.

 

커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넉넉하지 못한 지갑 사정 때문에 항상 가장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곤 했죠. 처음에는 시럽을 잔뜩 넣어 단맛으로 커피를 마셨던 제가, 어느새 시럽 없이도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돌고래 시간>에서 보낸 시간 덕분입니다. 그곳은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성숙하게 만들어 준 공간이에요. 그곳에서 공부하고, 과제를 해결했으며, 여행의 추억을 글로 남기고 새로운 여행을 꿈꾸었죠.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돌고래 시간>에 데려갔을 때, 그들 역시 이 공간에 매료됐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종종 "돌고래 시간?"이라는 암호 같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만나곤 했죠. 그렇게 우리가 모두 사랑했던 <돌고래 시간>은 철거된 공천포 집처럼, 아쉽게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3. 언제라도 무해하게, 스물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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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시간>이 사라진 후, 방황하는 사춘기 아이처럼 여러 카페를 전전했습니다. 마음 놓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죠. 교통이 불편해서, 거리가 멀어서 혹은 주인의 눈치가 보여서 등 여러 이유로 자주 카페를 옮겨 다녔습니다.

 

그즈음,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더욱더 마음 둘 곳이 필요했죠.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마음 놓고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지만, 나에게는 그런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스물다섯>이라는 카페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스물다섯>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저는 이곳이 나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돌고래 시간>에서 느꼈던 모든 것들이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요. 안락한 좌식 공간, 포근한 분위기, 좋은 노래와 따스한 공기. 그리고 창밖이 훤히 보이는 넓은 창문까지. 오자마자 여러 친구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돌고래 시간을 좋아했던 친구들은 당연히 이곳도 좋아했어요. 우리는 틈만 나면 "스물다섯?"하고 카톡을 주고받았고,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우연히 친구들을 <스물다섯>에서 만나는 경우도 잦았죠.

 

이곳의 외관만큼 사장님의 섬세한 관심도 좋았습니다. 나를 알아봐 주고 단골이라는 이유로 슬쩍 챙겨주는 간식부터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손님인 나에게 건네준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까지. 이런 마음에 보답하는 건, 생각날 때마다 자주 방문하는 것뿐이라고, 사라지지 않게 계속 가고 기억하는 것이라 여겨요. 그래서 저는 <스물다섯>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찾아가고 싶을 때, 다시 이곳에서의 기억을 헤집어 볼 수 있게요.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순간을 사진에 담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갑니다. 멈춰있던 내 공간에 다시 앉아 글을 쓰고요. 계속해서 저는 안식처를 찾아가 불안했던 마음을 앞으로도 계속 달랠 것입니다. 유년 시절 나를 달래던 집과 카페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더 열심히 기억하려고 합니다. 잊음과 잃음의 경중은 앞으로 기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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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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