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문학]

법의 질서가 없는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글 입력 2017.03.0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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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법의 질서가 없는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처음 소설을 읽고 나서의 내 반응은 단순했다. ‘그래서 눈병이 왜 생긴 것이지? 왜 깜깜한 어둠이 아니라 우윳빛으로 보였던 것이지?’와 같은 1차적 의문이 들었지만 사실 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눈병의 원인이 무엇인가, 어떤 영웅이 치료할 백신을 만들어 낸다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백색 실명이라는 상징적 매개체를 통해 무책임한 정부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들을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소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였다. 사건 사건마다 인간 내면의 깊숙한 심리들을 보여주었다. ‘눈’이라는 것은 우리의 소유이지만 그 당연히 소유했던 것이 없어졌을 때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였다. 형식적 측면과 연결해본다면 시야가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생략된 문장 부호나 쉼표나 마침표로만 이루어진 불편한 문체를 통해 독자에 감정을 이입시켰다. 겉치레와 형식적인 모습은 부질없다는 것은 작품의 내용과도 연관이 있다. 

  백색 실명이 전염된 사회에서 감염자들은 또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고, 그 테두리가 언제 깨질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나날들을 보냈다. 초기의 수용소는 정말 난잡하고 무질서한 사회였다. 소설의 전개에 따르면 그 안의 사람들은 질서나 규범과 같은 선이 없는 공간에서 자연스레 폭력성을 보였고 서로의 대표자를 뽑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사회적 인간’이 가지는 본능으로 비쳐졌다.   
  사실 태초부터 법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모를까, 눈이 멀기 전까지의 기존 사회에서 법이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수용소라는 공간에서 역시 질서라는 것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분명 불편함이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그들은 규율과 질서라는 것이 있어야 나름의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 각자 공평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의 대표자를 만들고 규율을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군대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압박과 공포에 몰아넣고 15계명의 수칙을 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런 반항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인다. 물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판단 아래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누군가의 명령이나 지배와 같은 압박이 편했을 지도 모른다.

  필자는 법, 질서, 크게는 규범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이 작품에서 얻진 못했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라면 ‘못할 것이다’에 가깝다. 무정부 사회의 태초 인류 역시 필요에 의해 사회계약론이 성립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 역시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다가 무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면 지금만큼의 삶의 질만큼의 만족감은 얻지 못할 것이다. 배려보다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이 자연스레 먼저 생겨날 것이다. 만약 공급은 한정되어 있지만 수요가 보다 훨씬 많은 상황이라면 수용소 안과 같이 한정된 식사 배급의 상황과 같이 (인간의 추악하고 잔인한 본성이 드러나 위계질서가 생겨나고 서로 이기심을 드러내보였다.) 실제 상황이었어도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전개를 띨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제기해본 문제는 과연 질서가 있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이다. 질서가 존재하지만 도덕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면 굳이 법이 있어야할 필요가 있을까. 결국 유명무실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왼쪽 병동의 사람들을 보고 그런 의문이 생겼는데, 오른쪽 병동의 1호 사람들은 나름의 체계와 규율이 있고 또한 왼쪽 병동 역시 조직이 형성되어 있다. 깡패 조직이긴 하지만 결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다. 그들 역시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역할과 규칙이 정해져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활을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그 왼쪽 병동의 깡패집단이 보여주는 극악무도함은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오른쪽 병동 사람들과 대비되어 더욱 부각되었다. 그들만의 체계가 있는 도덕적인 사회와 똑같이 체계라는 것이 있어도 비도덕적일 수 있다면 법이 있고 없고를 떠나 비도덕적 행동들은 개인의 본성과 양심의 문제로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벗어나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왜 법과 질서가 있어야하는가’ 라는 아주 뻔한 질문에 대해서 사실 답도 뻔하지만 읽는 내내 들었던 의문이었다. 사회 어디에나 선과 악은 공존하기 때문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성에 관한 것이다. 성욕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인간의 기본 욕구라고 느꼈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비극 속에서도 서로의 몸을 탐하는 광경이 종종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속에서도 진정성 있는 사랑을 느끼기도 했지만, 부인이 있는 의사나 노인이 검은 색 안경을 쓴 젊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는 내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굉장히 뜬금없는 상황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사의 아내는 그것을 지켜보며 이해한다는 시선이었기에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매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매춘까지 발생한 상황에서 왼쪽 병동의 깡패 집단은 단순히 여성의 성 문제를 떠나 인간의 존엄성 조차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른쪽 병동의 몇몇 남성들은 굉장히 이기적이었다. 생활을 유지해나감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 욕망인 식욕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의 희생을 은근히 바라면서도, 자신의 발언이 문제시 될까봐 말을 아끼는 사람들도 보였고, 반면 결사반대하며 존엄성을 해치는 일을 막기 위한 자들도 있었다. 결국 여자들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성을 팔았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명령에 굴복하는 모습이 분노스럽고 안타까웠다. 정말 수치스럽고 비참하지만, 당장에 본인 몫이라도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듯 또 자신의 의지로, 매춘을 감행한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었다.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실감나게 담고 있었다. 여러 부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특히 사람들이 전부 감염이 되어 도시 전체가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 그랬다. 유일하게 혼자 눈이 보였던 의사 아내의 눈으로 관찰되는 세상은 정말 혼란 그 자체였다. 폐허가 된 식료품 가게에서 아직 다른 이들이 발견하지 못한 지하실 음식 창고를 발견했을 때 부인은 타인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가. 사실 의사의 아내는 이러한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욕심보다는 그녀가 속해있는 단체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부인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의사의 곁에서 묵묵히 그를 챙긴다. 또한 선구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모습도 보인다. 왜 그녀는 눈이 안 보이는 체하며 스스로 격리 수용소에 남아있기를 자처했을까. 나라면 혼자라도 살아야겠다는 이기심이 더 커서 집에 꼼짝없이 숨어있었을 것 같다. 남편을 극심히도 사랑해서였을까. 사실 수용소에서의 둘은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거나 그렇지도 않았다.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비롯된 행동이기 보다, 그녀는 꼭 하나의 영웅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어른에게 의지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그녀에게 의지했다.

 그녀가 가위를 무기로 하여 왼쪽 병동의 사람들을 찔러 죽였을 때, 마치 악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머쥔 선한 영웅으로 보였다. 내가 부인이었더라면 죽을 각오로 덤비지 못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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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에서 가장 화가 나고 안타까웠던 순간들은 수용소에 주둔하던 군대의 모습을 볼 때였다. 그들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 때문에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수용소 안의 사람들을 사살했다. 특히 주검을 본인들이 알아서 묻으라는 명령을 발포했을 때는 너무 화가 났다. 소설이 아주 현실적이어서 우리 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정부는 아주 무능한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정말 최소한의 식량이나 물품만을 조달할 뿐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사태에 대한 뚜렷한 대처가 없었다. 결국 자꾸 퍼지는 전염병에 손쓰지 못하고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버렸지만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왜곡된 뉴스를 내보내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라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권의 모습은 참 소설이든 현실이든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당국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도대체 누가 떠맡아야 하는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마치 눈이 보일 때는 타인을 의식해서 행동하고 타인에 의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수용소라는 공간은 또 다른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 냈고 우리로 하여금 ‘본질’이라는 것에 끊임없는 물음을 제기했다. 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이 드러났는지도 모르겠다.
  현실 세계를 작품에 오버랩 시켜 작가가 던지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마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사리분별 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지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먼 사람들이란 거죠”

  괜히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것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있을 것이다. 결국 ‘두려움’이 실명이 원인인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듯 악에서 선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선에서도 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들을 잘 하지 않는다. 한 개인에게도 선과 악은 이분법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으며 공존해있다고 본다. 단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우리 세계의 모순을 드러내 보였다.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뜨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성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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