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연극이다?
‘삶은 연극이다’라는 비유는 닳고 닳은, 식상한 비유다. 그러나 이 식상함은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듯이, 여러 이야기를 통해 되풀이되고 있다. 나는 그 식상한 비유를 연상케 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형식을 부여해 삶을 의미로 채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게 된다. 결국 형식은 포장이다. 비극에서 동원되는 ‘카타르시스’라는 말도 설명하기 어려운 불분명한 감정을 그걸 비슷하게 재현한 극을 봄으로써 내면에서 청산하려는 욕구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단어가 아닌가.
그런 욕구를 나쁘다고 볼 수 없다. 적절한 형식은 다음을 선물하고 앞으로를 가정하게 하며 미래로 한발 한발 걸어가게 한다. 내면에서 삶이 성립하기 위해선, 시간의 불을 지폈다가 재가 될 형식이라는 땔감이 필요하다. 형식은 시작하기 위해서도 끝내기 위해서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만 이 부조리한 시간을 감당할 수 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여러 의미를 가미해 활용할 수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남겨진 인물들
이 소설은 제목도 ‘fin’인 만큼,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에겐 다르게 보인다. 끝났다고 하지만,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직접 끝을 내고 싶어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보인다.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시점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뒤풀이 자리에서 주인공 ‘메리’를 맡은 ‘최기옥’에게 남편 ‘제임스’ 역할을 맡은 ‘우태인’이 술에 취해 시비를 건다. 그의 지독한 술버릇 때문에 기분이 상한 기옥은 그의 사과도 무시했다가 다음 날 태인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소설은 그 죽음을 들은 최기옥과, 최기옥의 매니저인 ‘윤주’, 우태인의 매니저이자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상호’, 그리고 죽은 태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태인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나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을 풀어나갈 줄 알았는데 인물들의 끈적한 내면, 징그러운 내면, 그래서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는 데에 상당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연예인과 연예인을 관리하며 그들의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매니저들의 이야기가 질기게 얽히면서 서로를 믿지 않고 미워하지만, 내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어 자기 삶의 볼모로 붙잡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뒤바뀐다.
기옥-윤주, 태인-상호로 나눠 비교하면 기옥-윤주는 서로를 좀먹는 관계, 태인-상호를 서로를 해하거나 도망치고 싶어 하는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둘이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옥과 태인 모두 연극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해 영화를 전전하다 다시 연극으로 돌아온 셈인데, 자기 삶의 끝을 바랐던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삶이 버거운 이들
뒷부분에서 태인의 충동과 기옥의 충동이 같았음이 밝혀진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충동. 그리고 거기에 그림자처럼 깔린 죽고 싶다는 충동. 그건 그들 내면에 오래 도사린 욕망(본심, 혹은 본질)이었다. 직접 끝내고 싶어 하는 욕망. 삶이라는 역할을 벗어던지기. 삶은 연극이라는 식상한 비유에 능숙한 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태인은 성공했지만(자의가 아닌 듯하지만), 불안과 불면에 우울증까지 겪는 기옥은, 기옥을 돌보다시피 하는 윤주는, 태인의 뒤치다꺼리를 했던 상호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허하게 현실을 떠돈다. 마치 유령처럼. 끝나지도 않고, 도저히 벗겨지지도 않는 자기 역할에 버거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