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본질은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한 갈망엔 미학(美學 : 자연이나 인생 및 예술 따위에 담긴 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을 탐구하는 것뿐 아니라 한 번뿐인 생에 처절하게 매달리는 것도 포함된다. 예술의 창조는 자기표현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로 상처를 치유하고, 내면의 어린아이를 달래고, 들끓는 욕망을 분출하고, 때론 광기에 가까운 예민함을 창작의 수단으로 삼으며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린다. 예술가들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놓는 이들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해 고통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로서 유의미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무엇일까. 당연히 재능이다. 최소한의 재능조차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환경이 갖춰져 있어도 예술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아름다운 예술의 이면엔 고통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다면 그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현실적 조건이 없다면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만큼의 돈과 시간이 있어야 예술에 힘을 쏟을 수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로부터 많은 여성 예술가는 더 고통스럽게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냈다. 여자는 예술을 할 수 없다는 차가운 시선, 자신을 내세우는 것보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사는 게 먼저라는 사회적 통념 앞에서 많은 여성 예술가가 좌절했다.
영국의 여성 작가이자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다. 그는 1929년 출간한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만의 공간과 고정 소득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자기만의 방>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여성 교육 기관인 거턴 칼리지와 뉴넘 칼리지에서 강의한 원고를 보완한 형식의 에세이다. 당대 여성은 왜 ‘셰익스피어’가 될 수 없는지 안타까워하던 그는 여성 작가들이 ‘자기만의 방’ 문을 열 열쇠를 꼭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문학과 예술의 자양분을 누리며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얻고, 이복 언니와 오빠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의붓오빠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받았다. 그는 자신을 좀먹는 우울증과 환청·발작에 평생을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시대를 산 여성 작가들에겐 포기하지 말고 무엇이든 쓰라며 삶의 의지를 불어넣었던 그는, 정작 자신은 슬픔과 분노를 이겨내지 못했다.
버지니아 울프를 규정하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영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비극적인 인간. 그는 또한 같은 여성과도 뜨겁게 사랑했다. 그가 사랑한 여성은 <모든 열정이 다하고> 등 다수의 시와 소설, 동화로 영국 문학계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다. 버지니아 울프의 친구이자 동료 작가, 연인이었던 그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 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뜨거운 열기에도 종이가 타지 않은 게 놀라워 – 뮤지컬 <올랜도 in 버지니아>
2025년 7월 9일 서울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에서 개막한 <올랜도 in 버지니아>는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의 사랑, 여성 연대를 그려낸 창작 초연 뮤지컬이다. 작품의 전반부는 버지니아와 비타의 연애를 묘사했다. 작품 후반부는 여성이란 이유로 평생을 살아온 대저택 ‘놀하우스’를 상속받지 못한 비타의 좌절과 극복, 같은 여성으로서 장벽에 함께 맞서는 버지니아와 비타의 연대를 그렸다. 극은 버지니아와 비타가 소설 <올랜도>를 함께 집필하는 과정, <올랜도>의 내용도 극중극으로 보여주며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올랜도 in 버지니아>에서도 버지니아 울프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그의 정신 병력이 묘사된다. 하지만 그의 곁엔 연인 비타가 머물며 아픔을 어루만져준다. 비타 또한 놀하우스를 상속받지 못한 후 여유로움과 당당함이라는 정체성을 잃을 정도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극 후반엔 버지니아가 비타의 옆을 꿋꿋하게 지킨다. 젊고 잘생겼으며, 공을 세워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남성 ‘올랜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올랜도>를 집필하던 버지니아는 비타의 추락과 동시에 올랜도를 여성으로 바꾼다.
이처럼 극의 후반엔 여성 연대 및 페미니즘 사상이 담긴 전개가 이어진다. 극은 실제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버지니아의 죽음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그가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내며 집필을 이어갔는지, 어떻게 뜨겁게 사랑하고 연인의 아픔을 보듬어줬는지 그릴 뿐이다. 버지니아는 비타 덕분에 행복했고 아픔도 이겨냈다. 비타 또한 생을 뒤흔드는 절망 속에서도 버지니아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극은 두 여성의 사랑과 연대, 생을 향한 의지를 보여주며 삶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은 버지니아 울프를 작품 속에서나마 뜨겁게 살아가게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 작가들에겐 자신만의 공간과 고정 소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2년에 태어난 미국의 여성 작가 ‘실비아 플라스’는 온전한 자신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1963년, 31세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또한 버지니아 울프처럼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8세 때 아버지를 잃은 후, 평생을 자살 강박에 시달렸던 그는 아버지를 잃은 이듬해 바로 자살 시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8세에 ‘보스턴 헤럴드’에 시를 발표한 천재 작가였다.
실비아 플라스는 1950년 스미스 여자대학에 입학할 당시 이미 수백 편의 시를 썼으며, 2년 뒤 공모전에 입상하며 여성지 ‘마드무아젤’ 인턴 기자로 활동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그는 20대 초중반, 당대 최고의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해 딸을 낳는다. 영문학 강사로 활동하고, 첫 시집을 출간하며 어린 시절의 불행과 우울함을 이겨내던 그는 이듬해 둘째 아이를 유산한다. 그와 동시에 남편은 외도라는 배신을 저지른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 후 자전 소설 <벨 자(종 항아리)>를 출간했다. <벨 자>는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과 더불어 여성주의·여성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한 작품이다. 와인 잔을 뒤집으면 투명한 유리 새장처럼 보이는 것이 ‘벨 자’, 즉 종 항아리다. 실비아 플라스는 벨 자에 갇힌 자신에게서 착안한 ‘에스더 그린우드’의 일대기를 통해 상처를 예술로 승화했다. <벨 자>는 호평 받았지만, 생활고와 남편의 외도 스트레스에 괴로워하던 실비아 플라스는 1963년 목숨을 끊었다. 현장에선 죽음이 성공하지 않길 바랐던 흔적도 발견돼, 그의 마지막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글은 나의 대체물이죠, 선택이 아닌 꼭 해야 하는 – 뮤지컬 <실비아, 살다>
2022년과 2023년에 공연된 창작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실비아 플라스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뮤지컬의 실비아 또한 재능이 뛰어난 작가였지만 우울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작가 남편 테드를 내조하느라 정작 자신의 글을 쓸 시간은 부족했다. 그는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 작가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했다. 테드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매달리던 극 중 실비아는, 출간이 무산되고 생활고까지 찾아오자 자살을 시도한다. 그가 계획한 자살 방법은 실비아 플라스가 실행한 실제 방법과 유사하다. 하지만 현실과 극의 차이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극에선 ‘빅토리아’란 이름의 여자가 나타나 자살을 막는다.
실비아가 대학생 때 만난 친구인 빅토리아는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관념적 캐릭터다. 빅토리아는 실비아의 곁을 평생 맴돌며 친구가 돼 주기도 하고, 그가 목숨을 끊으려 할 땐 계획을 훼방 놓는다. 실비아는 어릴 때 눈먼 승객들 사이에서 홀로 기차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억지로 태운 기차는 중간 정차 없이 종점 아홉 번째 왕국에서만 내려야 했다. 빅토리아는 그 기차여행에서 만난 할머니이기도 했다. 즉 빅토리아는 실비아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였다. 빅토리아는 실비아 자신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벨 자>를 빅토리아 루카스란 필명으로 출간했다.)
부모님이 억지로 태운 기차는 삶을 상징하고, 중간 정차는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점 하차는 주어진 생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고, 눈먼 승객들 사이 홀로 눈을 뜬 실비아는 타고난 예민함을 나타낸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 즉 자신에 의해 다시 살게 된 실비아는 엔딩 때 기차에 오른다. 그는 빅토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기차에 탄 어린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이 장면의 어린 실비아는 아역 배우가 연기한다). 실비아 플라스가 최초로 자살 시도를 했던 나이가 9세였던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면서도 가슴이 아릿한 결말이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실비아 플라스 소설 <벨 자>의 문장이다. 평생 죽음을 시도하고, 작품들에서도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를 거부하고 능동적 죽음을 선택하는 여성 화자를 그려낸 실비아 플라스. 그는 10년에 한 번씩 자살 시도를 하면서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실비아 플라스는 30대 초반에 생을 마감했지만, 수많은 작품을 토해내듯 집필했기 때문이었다. 작가에게 있어 치열한 작품 활동은 생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다는 절규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라스 모두 남성 중심 사회라는 ‘유리 종’에 갇힌 여성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들의 삶은 닮았으며, 세계 또한 묘하게 연결됐다. 어릴 적 부모 중 한 명의 죽음으로 인한 정서적 충격으로 우울증이 발병했고, 남자 때문에 고통받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의붓오빠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고, 실비아 플라스는 남편의 외도에 무너졌다. 실비아 플라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강의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여성 교육 기관인 뉴넘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또한 그는 버지니아 울프를 동경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일기에 버지니아를 언급하며 ‘내 삶이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라고 쓰기도 했다.
<올랜도 in 버지니아>, <실비아, 살다>는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을 무대에서나마 살게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인생은 유명하다. 하지만 <올랜도 in 버지니아>는 그의 죽음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정신 병력조차 짧게 보여주고 지나간다. 극에선 버지니아 울프의 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치열했던 순간만을 찬란하게 그려낼 뿐이다. <실비아, 살다>는 실비아의 자살 시도까지 보여주지만, 빅토리아로 인해 죽음의 그림자는 빛나는 삶으로 변한다.
좌절에 몸부림치다 삶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은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엔 생을 불태워 어두운 사회를 빛으로 밝혔다. 버지니아 울프는 한땐 생활고에 시달리며 힘겹게 집필 활동을 했고, 실비아 플라스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벨 자>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으려는 치열한 여정을 거쳐 단단한 ‘자기만의 방’을 만들었다. <올랜도 in 버지니아>와 <실비아, 살다>는 그들의 반짝이던 생, 혹은 뒤바뀐 결말을 그려내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들을 위로하고 존중했다. 그러한 위로와 존중은 각자의 삶을 버티며 오늘을 살아낸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