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게임에 딱히 취미가 없는 나지만, 가끔 꽂혀서 하게 되는 게임들이 있다. 요즘은 어릴 때 했던 플래시 게임이 3D 그래픽으로 출시되었다고 하여 즐기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요즘 이 게임이 재밌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네, 해도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고 항상 시큰둥하다. 그러다 가끔 어릴 때 했던 옛날 게임이 재출시되었다거나 살다가 생각이 나면, 감격한 표정을 지으면서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주로 친오빠나 사촌오빠들이 차근차근 알려줬고 어리둥절한 나는 제일 쉬운 모드로 게임을 맛봤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한 명씩 돌아가면서 앉아서 게임을 했던, 그 옹기종기 모인 등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귀여워지는 것이다.


노스텔지어는 이렇게 모든 것을 이상화한다. 아무것도 상관없이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 즐겼던 게임, 드라마, 음악, 음식까지. 모든 문화는 이미 최고의 전성기를 지난 듯하다. 이렇게 과거에 도취해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마저도 과거와 연관되어 있어야만 마음을 여는 나를 발견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문화 꼰대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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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POP 꼰대


 

이십 대인 내가 음악에 소위 ‘꼰대력’이 있다고 하면 더 손위 어른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우스울까. 그러나 딱 2000년대~2010년대가 정말 아이돌 그룹이 우후죽순 성공하던 시대였던만큼, 학창시절 K-pop과 얽힌 향수도 강하고 그래서 더 ‘꼰대력’이 강해진 영역이다.


당신은 누구의 팬이었는가? - 나는 내 연배보다도 살짝 더 위인 ‘빅뱅’의 열렬한 팬이었다. 무엇이든지 ‘선구자’, ‘왕’, ‘레전드’ 등의 수식어가 붙는 그룹이었고, 그중에서도 나는 그들의 ‘선구자’라는 이미지에 마음이 동했다. ‘가장 먼저 ~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그렇게나 멋져 보였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을 지금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사실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과할 필요도 없었던 거였다. 가령, “빅뱅이 없었으면 이것도 없었을 테고, 저것도 없었을 테니, 다른 건 다 가짜야” 같은 논리이다. 그 ‘빅뱅’마저도 어떤 영향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으며, 세상을 바꾸는 일들은 그렇게 의도치 않게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나는 시기적으로 빠른 2, 3세대 아이돌 그룹 이후의 K-pop 그룹들에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를 가졌다. ‘요즘 애들은 다 똑같아, ‘진짜’ 음악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준으로 다른 것을 평가하는 일은 정말 위험하고 오만하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국 모든 것은 개별적이다. 그저 다 함께 연결된 다른 것임을, 다르게 좋을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할수록 문화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닫혀있던 마음을 사뿐히 열고 들어온 게 ‘뉴진스’였다. 부정할 수 없이 좋은 음악과 스타일이었다. K-pop의 판도에 하나의 미학적 전환을 가져왔던 그녀들이 너무 빨리 자취를 감췄다. 여러 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대중의 품으로 돌아와서 나 같은 젊은 늙은이들에게 빛을 밝혀주기를 응원한다.

 

 

 

#2. 영화 신입


 

한편 영화는 반대로, 아직 파릇파릇한 신입이다. 스물 즈음 전까지 영화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유명한 배우가 나온 화제의 영화가 개봉했다고 하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극장을 찾는 정도였다. 그런데,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흥행하면서는 달라졌다. 일과를 마친 후 영화 한 편씩을 보는 맛을 알게 됐고, 하나둘 비교적 덜 유명한 영화들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잘 알지 못해서, 혹은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낯설고 이상한 영화여도 그런대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력이 있는가 보다 하고 여기게 되었다. 아직도 영화에 대해 한참 모르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영화를 보다 보니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꼭 영화란 걸 만드는 사람들의 특성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구나. 지루해도 좋은 영화가 있고, 재밌어도 싫은 영화가 있구나. 이렇게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게 참 좋다.


관람한 영화의 개수가 늘어나면 ‘영화 취향’이 만들어지는 걸까? 평점이나 후기를 남긴 영화들을 되돌아보면 나의 취향이 점차 보인다. 주로 소소하면서도 삶으로 묘사하는 깊은 철학이 있고, 끝은 나름의 긍정이 있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영화에 대한 선호가 생기는 중일 수도 있지만, 마치 한약이나 영양제처럼 내 몸에 맞는 걸 찾으면서 되레 내 몸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어쨌든 노스탤지어가 없는 덕분이라고나 할까, 영화에 대해서는 아직은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 아직 내가 찾지 못한 종류의 영화는 무엇일지 생각하면 설레고, 오히려 남들은 별로라고 하지만 나만이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일까 기다려진다. 어쩌면 영화 신입인 이 시기에 만든 취향으로 남은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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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잊고 살고 싶지 않은 것들


 

핸드폰 메모장에 ‘잊고 살고 싶지 않은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이 있다. 살다가 번쩍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강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들을 모아두는 공간이다. 내 방에 있었던 바보 같은 로봇 강아지나, 애지중지 키우던 노란색 꽃이나, 전자사전 속에 있었던 애니메이션 등이다. 그렇게나 아끼고 좋아하던 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사실이, 가끔 소름이 끼친다. 나에 대한 실망인지, 기억에 대한 배신감인지, 애틋함인지 슬픔인지 분노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사람은 익숙한 걸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곁에 있고, 다치지 않게 지켜주고, 이사를 갈 때도 버리지 않는다. 각자의 취향이 있고, 취향이 짙은 사람을 매력적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조금만 여지를 둘까 보다. 확고한 취향이 있는 것까진 좋으나 그 취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떠올려 보려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무거나 집어먹어 보던 때가 아니었던가. 그것이 나를 이루었고, 나는 계속해서 변할 수 있는 무언가다. 그렇게 취향도 나도 변하는, 취향을 알아가고 그 덕에 나를 또 알아가는 오고 감을 반복할 수 있다.

 

짧은 인생이니만큼 다양한 내가 될 기회를 어째서 마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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