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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미지의 서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지가 나에게 다가오다
처음에는 《미지의 서울》의 기획의도를 읽고 흥미를 느껴 이 작품을 접하게 됐다.
내 삶은 이렇게나 복잡하게 꼬여있는데,
타인의 삶은 참 단순하고 쉬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저 외모였으면, 저 조건이었으면, 저 성격이었으면…
인생이 지금보단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막상 누군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아픔과 고난을 가진,
그저 행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비로소 사랑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에게는 어떨까요.
그동안 어떤 아픔과 고난을 안고 살아왔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남에게는 들이대지 않을 가혹한 잣대로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미워하고 있지는 않나요?
나에게는 내가 여유를 잃고 자신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 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적어도 나만큼은 나 자신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소중하고 깊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하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다. 망설임 없이 넷플릭스를 켜서 시청을 시작했다.
미지와 미래
미지는 단거리 육상 유망주로 주목받았지만, 부상으로 은퇴한 인물이다. 더는 꿈도 계획도 없이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지만, 여전히 삶에 눈을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히로인이다.
미래는 선천적 심장병으로 유년기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냈다. 덤덤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취업까지 엘리트의 길을 걸으며 빈틈없는 모습으로 여린 속을 감춰온 완벽주의자이다.(출처 -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이 둘은 너무 다르게 느껴지지만 겉모습이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이다. 미지는 서울로 미래를 찾아갔다가 그녀가 회사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후 ‘인생 체인지’를 제안하며,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바꾸어 살아가기 시작한다.
미지와 호수
호수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여유를 지닌 인물이다. 누가 봐도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은 교통사고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다. 겉보기엔 단점 하나 없는 고고한 백조처럼 보이지만, 물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물갈퀴질 중이다.(출처 -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5화에서 두손봉을 오르며 들던 감정을 알려주던 호수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날 전교생 중에 내가 꼴찌였어. 다들 내려가는데 나만 올라가고.
솔직히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고 그냥 포기하고 내려가려고 했어.
근데도 계속 올라간 건, 내려오는 애들 중에 미지가 없었거든.
나도 나를 못 믿었는데, 내가 올 거라고 믿고 계속 기다려 준 거야.
미지가.
자신마저도 잘 믿지 못하는 자신을 미지는 굳게 믿어주었다. 이는 호수가 미래를 좋아하게 된 계기이다.
둘의 첫사랑은 서로이지만 고등학생 때, 서로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오해로 인해 엇갈려 버린다. 둘의 관계는 얽힌 듯해 보이지만 사실 충분히 풀 수 있는 실타래이다.
둘의 첫만남 역시 오해의 범벅이었다. 호수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인해서 귀 한 쪽이 들리지 않는다. 이를 몰랐던 미지는 그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귀 먹었냐?‘라는 망언을 뱉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데 천부적인 미지는 결국 호수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한다. 신발에 돌이 들어간 것처럼,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호수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미지가 된다.
과거에는 첫사랑이라서 계속 돌아보게 되었다. 미지와 미래가 몸을 바꿔버린 지금도 미래가 된 미지를 보며 호수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어진다. 귀여운 둘의 관계성은 다음 화를 기다리게 한다.
이야기와 사람을 끝까지 붙드는 힘
같은 얼굴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인생을 대신 살아간다는 소재는 《페어런트 트랩》, 《고교처세왕》 등 매개체에서 종종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미지의 서울》은 삶에 대한 위로와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결을 달리한다.
작가는 ‘이강‘으로 대표작은 《오월의 청춘》이다. 그의 작품을 보며 느낀 점은, 이강은 절대 이야기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드라마 속 캐릭터는 혼선을 줄이기 위해 성격이 단순화된다. 하지만 이강의 인물들은 다르다. 《미지의 서울》에는 다양한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흐름에 밀려 소외되는 인물이 없다. 작가는 모든 인물을 끝까지 붙들고, 그들의 서사를 성실하게 들려준다.
쌍둥이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엄마는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딸들을 걱정하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미지는 명랑하고 씩씩한 인물이지만, 사실은 부상 이후 3년간 집 밖을 나서지 못했다. 그 시간 속에서 무너졌던 내면과 복잡한 감정이 엿보인다.
미래는 차갑고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은 미지를 위해 머리를 자르고 대신 학교를 다녔던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이강의 글은 극의 흐름을 단단하게 끌고 가며, 매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또렷하게 담는다. 필요한 복선을 적절히 던지고, 시청자들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도록 회수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오랜만에 만나게 된 치밀한 대본에 감탄하게 된다.
글을 마치며
《미지의 서울》 속 ’미지’는 주인공의 이름이자 ‘아직 알지 못함‘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의 미래 역시 그렇다. 누구에게나 미지의 영역이다.
지레 겁먹지는 말자.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는 본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