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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지난해 10월 브로콜리너마저의 네 번째 정규 앨범을 들으며 마음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다섯 번째 트랙 <풍등>과 열두 번째 트랙 <영원한 사랑>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들었다.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일상적인 풍경들을 마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없었던 시기. 홍대입구역 1번 출구로 빠져나와 골목길을 걸으며 음악을 듣던 내 모습이 선연하다. 이사한 이후로 그 골목길을 다시 걷진 않지만, 그 시기의 마음은 같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반복 재생된다.

 

돌이켜보면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통해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배운 것 같다. 과거에도 실패했고 지금도 여전히 실패하고 있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실패를 대하는 방식. 실패 때문에 낙담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껴안고 나아가기. 따갑지만 그렇게 하기. 중요한 건 실패를 회피하는 게 아닌 실패한 이후의 이야기니까.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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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관통하는 정서와 앨범의 커버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 하얀 깃털 같기도, 말려 올라간 꽃잎 같기도, 붓 자국 같기도 한 사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고요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한바탕 울고 난 뒤에 얼굴 위로 떠오르는 무표정 같은 것.

 

앨범의 제목은 삶에 대한 단호한 진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삶에 대한 비관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브로콜리너마저가 집중하는 것은 '실패'라는 상태 자체보다 실패 이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질문'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것은 씁쓸함을 내재한 희망의 정서에 가깝다.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다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감당하고 있는 무게를 이해하고 싶다.

드러내지 않는 어둠을 먼저 찾아내어 그 속에 함께 머무르고 싶다.

 

그리고는 별일 없던 마냥 가던 길을 계속해서, 서로의 존재를 응원하면서 그저 나아갈 수밖에 없다.

굳이 이렇게 헤매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은 그래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는 이어지는 '다만' 뒤로 미루어 놓기로 하자.

 

- 브로콜리너마저 4집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 앨범 소개 中

 

 

 

1.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새 신발을 신고 나온 날처럼

걷다 보면 언젠가는 무뎌지겠죠

신발의 목적은 원래 닳아가는 것 아닐까요 

어떤 노래는 날개를 달고

적은 몸짓으로 높이 오르지만 

내가 불러주는 만큼만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이름도 있죠

모든 것이 닳더라구요

삶도 노래도

뭔가 이뤄내면 괜찮을 줄 알았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시간을 이길 수 없죠 

사랑도

사람도 

나의 모든 게 닳아요 

몸도 마음도

꿈과 사랑도

 

 

"신발의 목적은 원래 닳아가는 것 아닐까요"라는 가사에서 '신발'을 사람, 사랑, 삶, 노래, 몸, 마음, 꿈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삶의 목적이 닳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닳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닳는다는 것은 단지 낡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의 길이, 두께, 크기 따위가 주인에게 맞는 방식으로 변형된다는 뜻이다.

 

그런 시선으로 '모든 것들의 닳음'을 바라본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들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더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5. 풍등


 



 

그리 멀리 떨어지네

쉼 없이

불꽃처럼 사라져 버리네

이제는 볼 수 없네

끊임없이 떨어지네

일없이

흩어지는 빛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네

이제는 볼 수 없는 시간들

소망 같은 것들

바람 같은 것들

어딘가로 사라지겠지만

그리 멀리 떨어지네

쉼 없이

불꽃처럼 사라져 버리네

앞으로 우리에게

몇 번의 여름이 더

앞으로 우리에게

몇 번의 여름이 더

 

 

이미 멀어진 것들, 멀어지고 있는 것들, 멀어질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곡. 떨어지고, 사라지는 하강과 소멸의 이미지가 쓸쓸함을 풍기는 곡이다.

 

여름이 지나간다는 것은 많은 것을 맞이하고 또 떠나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우리에게/몇 번의 여름이 더"라는 반복되는 가사에서 세월의 덧없음이 상기되기도 하지만, 유한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여름들을 맞이해야겠다는 마음도 든다.

 

다섯 번째 트랙인 <풍등>을 듣다 보면 앨범 소개의 다음 부분이 떠오른다. "굳이 이렇게 헤매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은 그래도 해야 한다." 그럼에도 헤매어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 우리에게/몇 번의 여름이 더" 다가오기 때문에. 여름을 향해 나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숨 쉬는 존재이기 때문에.


 

 

12. 영원한 사랑


 



 

세상은 기대감에 높은 값을 쳐 주지만

책임은 마지막에 남아 그 값을 치르는 것

속이는 일만 남아 있는 세상에서

끝까지 속아야만 하는 것 

영원한 사랑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영원한 사랑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영원한 사랑은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

그게 언제인지 아무도 모를 뿐이지

언젠가 모두 끝나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다만 소리 내어 울지 않을 뿐이지

 

 

"책임은 마지막에 남아 그 값을 치르는 것"이고 "영원한 사랑은/가장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대에 대한 값을 마지막에 남아 치르는 것이 책임이라면, 우리는 사는 동안 어떤 값을 치르게 될지 알 수 없다.

 

삶은 직선이 아닌 마구 엉킨 곡선이다. 태어남과 닳음, 지속과 소멸,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순환하는 굽은 선이다. 그럼 실패를 받아들인 이후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열두 번째 수록곡에는 4집 앨범의 제목이 가사로 등장한다. 우리가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다면, 중요한 사실은 그게 언제인지가 아니다. 실패한 이들이, 다만 소리 내어 울지 않는 이들이 서로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기대어 다시 나아가면 된다는 진실은 내뱉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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