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순과 고통, 치열한 갈망이 어떻게 이미지로 남게 되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이연 작가의 문장은 마이클 페피엇의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도서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미술평론계의 거장 페피엇이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27명의 예술가들을 향한 열정적인 찬사로, 단순한 미술사 교과서를 넘어선 친밀한 고백록이기도 하다. 페피엇은 이 예술가들이 삶의 허무와 좌절을 이겨내고 창작이라는 불꽃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했는지, 그 고통스러우면서도 눈부신 순간들을 섬세하게 기록한다. 예술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바꾸고, 힘든 순간에도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는 그 변화의 힘이다.
작가는 반 고흐부터 오브지 비어즐리, 호안 미로, 베이컨, 자코메티, 앙리 마쇼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거장들을 소개하며, 단순히 작품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성장환경, 생각, 삶의 태도, 인간관계, 창작 과정, 예술관까지 날카롭게 들여다보며 개인적 삶이 어떻게 예술과 불가분하게 얽히는지를 탐구한다. '삶은 곧 예술가의 작품이며, 작품은 곧 삶이다.'라는 페피엇의 신조를 따라 작가들의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 첫 장을 여는 예술가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다. 강렬한 햇빛과 깊은 그림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했던 화가, 페피엇이 말하는 '진정한 열정'의 화신으로서 반 고흐의 이야기부터 살펴본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자와 햇빛의 사이에서
"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하는 책을 여는 글이라면, 빈센트 반 고흐에게 바치는 헌사만 한 선택도 없지 않을까?" 마이클 페피엇의 이 첫 문장은 반 고흐가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를 단번에 보여준다. 페피엇에게 반 고흐는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특히나 남다른 감응을 일으키는" 존재다. 그의 글에는 학술적 분석을 넘어선 진심 어린 애정과 경외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페피엇은 반 고흐의 매력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에 담긴 생생한 목소리다. "편지를 읽다 보면 반 고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마치 그의 말소리를 엿듣고 있는 것처럼." 둘째는 그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즉각적인 시각적 교감이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예술가도 반 고흐만큼 시각으로 그렇게 직접적이고, 그렇게 다급하게 호소해 오는 인물은 없다."
페피엇의 산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붓질처럼 생생하다. 그는 반 고흐의 작품이 주는 충격을 "붓 터치 자체만으로 어떤 의미나 서사를 거치지 않은 채 즉각적인 교감을 전해 온다"고 표현하며, 이 경험을 "작열하는 햇빛처럼" 또는 "바그너의 오페라 첫 악절처럼" 의식에 곧바로 침투하는 강렬함으로 묘사한다. 이런 비유와 직관적인 표현들은 페피엇의 글을 단순한 미술 비평이 아닌 문학적 산문으로 승화시킨다.
페피엇은 반 고흐의 작품이 지닌 보편적 호소력을 깊이 파고든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면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따를 예술가는 없다"라고 단언하는 그는, 어떤 미술관에 걸리든 반 고흐의 그림이 "보자마자 단박에 관심을 일으켜 언제나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발산한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페피엇이 반 고흐 작품의 강렬함이 오히려 소재의 단순함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시각이다. "닮아빠진 장화, 꽃병 속 해바라기처럼 소재가 단순할수록 작품이 뿜어내는 강력함은 더 강해지는 듯하다." 이는 비평가로서 페피엇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반 고흐의 그림이 "물감 안에 생의 절박함을 불어넣기라도 한 것만 같다"고 표현하며, 예술과 삶의 불가분성을 강조한다.
예술가의 성장 과정
페피엇은 반 고흐의 생애를 더듬어가며 어떻게 그가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는지 면밀히 담아냈다. 1853년 네덜란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반 고흐는 유년 시절부터 자연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화가로서의 두각은 훨씬 후에 나타났다. 저자는 반 고흐가 겪어온 다양한 직업과 실패의 여정을 차분히 짚어가며, 이 모든 경험이 어떻게 그의 예술적 성숙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특히 벨기에 탄광촌 보리나주에서의 경험은 반 고흐가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페피엇의 서술 방식은 연대기적이면서도 동시에 반 고흐의 내면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반 고흐의 실패, 좌절, 외로움을 생생하게 묘사하지만,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성장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포착한다. "가슴 아픈 순간들로 점철된 현실을 살아가며 거쳐 온 그림 양식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화가로서 뚜렷이 성장해 간 모습이 엿보인다"라는 구절은 페피엇이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잘 보여준다.
책의 중심부에서 페피엇은 반 고흐 예술의 본질을 파헤친다. 그는 "웬만한 19세기 말 그림 컬렉션을 들여다볼 때 유독 눈이 자꾸 가는 작품이 반 고흐의 그림인 경우가 많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답이 주제의 독창성이나 기교의 완벽함에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반 고흐의 그림이 지닌 특별함은 페피엇에 따르면 "질감"에 있다. "그림의 질감이 일단 시각에 박히면, 마음을 휘저으며 동요시키는 마력을 여지없이 발산한다." 그는 반 고흐의 작품이 "어지간한 심미적 반응은 따라오지 못할 만큼 월등히 날카롭고 압도적인 반응으로 즉각적인 신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묘사한다. 페피엇은 반 고흐가 예술에 되찾아준 것은 다름 아닌 "열정"이라고 강조한다. "반 고흐가 이뤄 낸 최고의 업적은 예술에 열정을 회복시킨 것일지 모른다." 이는 그의 비평적 안목이 단순히 형식적 분석에 머물지 않고, 예술의 본질적 가치와 역할에 대한 깊은 통찰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반 고흐의 그림은 일기였다.
가장 돋보이는 주제는 반 고흐에게 있어 삶과 예술이 얽혀있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삶이 자신의 작품과 이토록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힌 경우는 드물다"라고 강조하며, 반 고흐의 그림을 "일기"에 비유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반 고흐의 비극적 인생을 단순히 감상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반 고흐가 아무리 극적이었다고 해도, 비상한 재능이 없었다면 극적인 삶의 감정들을 그토록 강렬히 전달해 낼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함으로써, 단순한 '고통받는 천재' 신화를 넘어서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페피엇은 반 고흐의 특별함이 "자신의 강렬한 감정과 불길함을 그대로 전해 주는 남다른 능력"에 있으며, 그에게 "예술은 자신의 거친 감정을 다루기 위해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시각은 예술을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닌, 삶의 복잡한 감정을 다루는 생존 방식으로 이해하게 한다.
마이클 페피엇의 글쓰기 스타일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그의 문장은 학술적 엄밀함과 시적 감성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반 고흐의 그림은 바로 그 질감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다", "반 고흐는 압생트가 담긴 유리잔이든, 새롭게 눈에 들어온 풍경이든, 이 화가의 깊은 연민을 자극한 얼굴이든, 꽃 피는 아몬드 나뭇가지에서 비롯된 기쁨이든 일상을 간단한 스케치와 드로잉으로, 습작이나 완성작의 유화로 담아내며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와 같은 구절은 단순한 미술 비평을 넘어 문학적 산문의 경지에 이른다. 페피엇은 광범위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코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다. 그는 복잡한 예술 이론을 쉽게 풀어내면서도 전문성을 잃지 않는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글은 미술사적 맥락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개인적인 감상과 직관적 통찰을 담아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페피엇이 반 고흐의 편지를 인용하며 그의 생각과 감정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다. "내 인생 계획은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를 하는 거야. 최대한 많이, 최대한 잘 그리고 싶어. 그렇게 살다가 생이 다하면,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애정과 동경을 담아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내가 못다 그린 그림들을 아쉬워하며 떠나고 싶어!"와 같은 인용은 반 고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페피엇은 반 고흐의 죽음과 그 이후의 유산을 다룬다. 1890년 7월 27일,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쏜 반 고흐의 마지막 순간은 그의 삶만큼이나 비극적이다. 페피엇은 동생 테오에게 남긴 반 고흐의 마지막 말—"슬픔은 계속될 거야"—을 인용하며, 그 짧은 문장에 담긴 깊은 의미를 독자가 음미하도록 한다. 반 고흐의 삶과 작품에 관한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목사의 아들이 어떻게 겨우 10년 사이에 그토록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시대가 지나도록 여전히 깊은 인간적 연민과 고양감과 불안감을 일으키는 작품들을 그려 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독자에게 반 고흐의 예술이 지닌 영원한 수수께끼와 매력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페피엇은 한 가지 확실한 답을 제시한다. 반 고흐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의 예리한 시선의 초점이 언제나 인간으로서의 조건, 즉 우리 자신의 운명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 고흐가 발휘하는 불멸의 천재성의 근원은, 그가 내면의 혼돈에 부여한 질서"에 있다는 통찰력 있는 결론으로 이 장을 마무리한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단순한 미술사 교과서나 작가 연구서를 넘어서는 작품이다. 마이클 페피엇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과 깊은 전문성을 결합해 독특한 작가만의 시선을 담았다. 페피엇의 가장 큰 미덕은 그의 글이 지닌 '접근성'에 있다. 그는 전문적인 미술 용어와 이론을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결코 일반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문장은 마치 친구와 나누는 열정적인 대화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반 고흐는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를 하는 거야"와 같은 직접적인 인용을 통해 독자를 예술가의 세계로 직접 끌어 들인다. 또한 페피엇의 글은, 예술가의 삶과 내면 세계, 그리고 예술적 발전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반 고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예술가의 개인적 고통과 갈등이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접근은 예술을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닌, 인간 경험의 깊은 반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 책의 특별함은 페피엇이 예술가들을 마치 오랜 친구처럼 친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그는 자신과 예술가 사이의 개인적 유대를 숨기지 않으며, 이것이 오히려 그의 비평에 생생함과 진정성을 부여한다. "내가 깊은 관심을 가져온 그 모든 예술가 중에서 반 고흐는 특히나 남다른 감응을 일으킨다"와 같은 고백은 독자로 하여금 비평가의 여정에 함께 하게 만든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예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매력적인 입문서이자, 동시에 예술을 깊이 이해하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깊이 있는 연구서다. 이 책은 우리에게 예술을 단순히 감상하는 것을 넘어, 예술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에서 반 고흐는 박물관의 벽에 갇힌 먼 옛날의 화가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생생한 존재다. 그는 우리에게 "그림자와 햇빛의 사이"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아낸 한 예술가의 용기와 집념, 그리고 그 불멸의 유산을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이 책의 나머지 장들도 이처럼 26명의 예술가들을 통해 예술의 다양한 면모와 인간 영혼의 깊이를 탐구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