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는 나를 유난히 전시에 많이 데리고 다니셨다. 아이였던 내게 미술관은 지금처럼 설레는 곳은 아니었다. 어린아이에게 그림은 감상보다는 견디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그저 다리가 아파 미술관에 들어오자마자 나가고 싶어 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어릴 때 재미있게 봤던 전시가 앤서니 브라운 전시다. 정확한 장소나 구성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림책 하나하나를 탐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 같은 느낌을 주는 전시회였다. 그래서 그림책 하나하나를 따라다니는 그 시간은 놀이처럼 느껴졌고, 어른이 된 지금도 어렴풋이 감각이 남아 있다. 그래서 앤서니 브라운의 세계를 다시금 걸어보고 싶었다.
앤서니 브라운은 나뿐만 아니라 한국, 아니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는 그림책 작가다. 이번 <앤서니 브라운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에서는 '고릴라 할아버지' 앤서니 브라운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총 260여 점의 원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미디어아트, 체험형 콘텐츠까지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작가의 삶과 철학에 맞춰서 그림책을 한 권씩 보는 느낌이지만, 작품 자체보다도 그의 작품 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고, 어떤 것을 위주로 그렸고, 작가가 관찰한 수많은 것들 중 무엇을 유독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앤서니 브라운은 한때 의학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수술에 쓰이는 그림을 그렸던 이력이 있다. 해부학적 정확도와 섬세한 관찰력이 요구되는 일을 통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브라운의 세밀함이 단련되었을 거라 짐작한다. 이번 전시에서 직접 마주한 그의 원화들은, 그림책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정교했다. 디지털 인쇄로는 담아지지 않는 감정의 밀도, 붓의 결이 살아 있었다.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 세계는 그의 유년기 경험이 주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꾸준히 가족을 작품의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써왔다. 가족 구성원을 한 명씩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대에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과 형제자매에게 느끼는 라이벌 의식 같은 것도 감추지 않고 그린다.
가족 간의 따뜻함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 이야기에서 독자는 모든 감정을 수용할 수 있다.
The Three Wishes 2022 ⓒAnthony Browne
그의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초현실주의이다. 브라운이 이를 위해 자주 쓰는 기법은 '변형'이다.
<이제부터 변할 거란다>라는 작품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단단하고, 차갑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만약 정반대의 특성, 즉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아 있는 짐승으로 변한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주전자는 고양이가 되고, 소파는 고릴라가 된다. 이는 사실 변화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은 그림으로 표현될 때 해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림책의 매력일 것이다.
마지막은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셰이프 게임(Shape Game)’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는 앤서니 브라운이 어린 시절 형과 즐겨 했던 놀이로, 한 사람이 먼저 자유롭게 그린 모양에 다음 사람이 상상력을 더해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이 셰이프 게임 외에도 가족이 함께 앉아 관람할 수 있는 미디어 아트, 포옹하며 찍어볼 수 있는 포토존 등은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잘 살려낸 전시 구성이다.
내가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온 것은 '시그니처'의 매력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에는 이스터에그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만의 시그니처가 있다. 고릴라, 숲, 윌리, 그리고 바나나. 이들은 브라운의 작품세계를 상징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릴라다. 고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런 맥락 없이 카메오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앤서니 브라운은 고릴라를 그리는 일을 "환상적인 경험"이라 말한다. 얼굴의 세밀한 주름, 사람처럼 복잡한 감정을 담는 눈, 표현이 풍부한 털. 그에게 고릴라는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또 하나의 대표 캐릭터 침팬지 ‘윌리’는 사실상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다. 윌리는 수줍고, 다정하며, 세상의 소음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존재다. 그림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윌리의 시선이 작가의 시선과 겹쳐진다.
사실 내가 앤서니 브라운을 어릴 때 좋아했던 이유는 이 시그니처들 덕분이다. 익숙한 캐릭터지만 그럼에도 늘 흥미진진한 세계가 펼쳐졌다. 시그니처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만의 언어가 생긴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그만큼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 지니는 든든한 무기이자 유산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다면, 내 삶의 흔적이 그만큼 쌓여왔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그니처는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우선, 자신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앤서니 브라운은 뛰어난 관찰자이다. 그는 “아이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리면 되는지 물으면 저는 언제나 ‘아주 자세히 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시그니처는 '시그니처를 남겨야겠다'는 거창한 철학이나 목표로 시작되지 않는다. 관찰에서 시작되고, 이를 '그려볼까?'하는 충동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단지 지금 이 장면이 재미있어서,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유희적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 소소한 충동들은 축적되고, 시간이 지나며 반복되고, 의미가 붙고, 비로소 시그니처가 된다. 창조성을 향한 나만의 놀이는 나의 고유한 정서적 리듬이자 끊임없이 되돌아가고 싶은 세계를 만들어준다.
세상에 수많은 창작자, 말하는 사람, 예술가가 있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은 결국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늘 앤서니 브라운을 비롯해 본인과 타인에게 시그니처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동경해왔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고릴라, 바나나, 윌리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내 안의 창조성을 깨우는 <앤서니 브라운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 전시는 9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