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어 몇 마디로 어느 정도 구색 갖춘 그림 혹은 음악이 생성되는 2025년의 기술은 경이롭다.
올해 3월에는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연구진이 오픈AI의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대상으로 튜링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GPT-4.5 인격형의 경우 참가자의 73%에게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해당 비율이 50%가 넘으면 튜링 테스트가 통과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 답지 못하다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약 100여 년 전, 새로 발명한 기술을 찬미하고 이들과 함께 할 희망찬 역동성을 긍정했다. 곧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함께 인간과 서구 문명, 파시즘, 기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미지의 자연에 대한 공포를 타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수단으로써 기술은 너무나 매력적이기에 지금까지, 앞으로도 인간은 더욱 인간스러움을 넘어서 초인간적인 첨단 기술을 개발할 것이다.
독일의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역사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사회 형식과 생산조건에 의해 특성이 변화하는 매체 예술에 관한, 특히 사진과 영화가 우리의 지각과 사회에 미치는 효과를 다룬 이론이 대표적이다.
다만 그의 사유를 경유하는 에세이나 서평은 노벨레(Novelle)의 형식으로 산문과 운문을 넘나들며 마치 꿈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발터 벤야민, 『고독의 이야기들』, 김정아 옮김, 엘리, 2025.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카이저파노라마’가 등장하는 『고독의 이야기들』(2025)의 여섯 번째 글 〈두 번째 자아: 새해 전야 성찰을 위한 이야기〉는 이 기계장치를 이용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군식구 없는” 독신남 크람바허’는 밤 9시에 혼자만의 술자리를 벌이고 깊은 상념에 빠진다. 아스라이 떠오른 외로움, 폐소공포증, 충동, 비난, 열등감, 억압을 마주한 장면이다.
["그때 저 길로 가고 싶었는데 / 그때 저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 그때 저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는데 / (…) 그때 저 책을 읽고 싶었는데 / 그때 저 기회를 잡고 싶었는데"] - pp.43-44.
저자는 열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달’을 기존의 상식을 문학적으로 전복하는 매개체로 다룬다. 지구의 위성으로써 달이 아닌 오히려 달을 수호하는 지구로 상정하여 산을 바다로, 잠을 죽음으로 떠올린다. 이 부분에서 벤야민의 혁명적 의지를 감지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빛이 사라지기 직전 달빛 속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던 불안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내게 떠올랐던 건 이런 질문이었다. 대체 왜 세상에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 대체 왜 세상은 있는 것일까?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세상을 생각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매번 새롭게 놀라며 알아차리면서."] - pp.83-84.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을 파편적으로 서술하며 배경도 대부분 독일인지라 상상하는 데에 한계가 있지만 벤야민이 머문 시대의 경향과 그의 생각을 추적할 수 있었다. 1부 꿈과 몽상, 2부 여행, 3부 놀이와 교육론으로 구성한 이 책은 벤야민 연구자들의 충실한 편집을 거쳐 그의 생전에 미발표된 원고가 다수 포함돼 있고, 해설까지 수록되어 있다.
더욱이 벤야민이 1933년 나치 정권을 피해 유럽을 망명할 동안 품에 지닐만큼 아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회화가 글의 시작 전에 삽입돼 있다. 50여 점의 그림과 42편의 글을 서로 연결 짓는 상상을 매번 할 수 있다.
벤야민이 ‘아이들’이 상상의 영역인 유희(놀이)의 가능성을 보았듯, 클레 역시 아동의 그림에서 보이는 꿈처럼 원초적인 방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점차 합리주의에 기반한 회화 원리를 파괴함으로써 추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1920, 모노프린트, 31.8×24.2cm,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예루살렘.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기술 재생산이 가능하여 유일무이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Aura)의 권위적인 힘에서 벗어나면서 감상자의 태도 및 위치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독해를 넘어서 생산의 영역까지 일순간에 획득하여 소비자와 생산자가 순간순간 뒤바뀌는 경험을 한다. 과연 우리는 기술 덕분에 해방되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도리어 기술에 대한 인간의 의존도가 심화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성찰이나 자각 없이 원본 없는 복제품만을 소비만 하지 않나 싶다. 직원들의 과로나 어마 무시한 전력 소비량을 무시한 채 AI에게 ‘지브리 풍’의 셀카를 생성해달라고 하듯이.
이런 때에 1세기 전 벤야민이 부렸던 신비한 경험담이 절실하다. ‘나’에 대한 탐색, 세계에 대한 고민, 최신 기술의 가능성, 예술의 방향성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시도한 놀이가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발터 벤야민(역 김정아), 『고독의 이야기들』, 엘리, 2025.
캐롤 스트릭랜드(역 김호경), 『클릭 서양미술사』, 예경, 2013.
할 포스터, 로잘린드 크라우스 외 3명(역 배수희, 신정훈, 오유경), 『1900년 이후의 미술사(모더니즘.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3판)』, 세미콜론, 2016.
“GPT 4.5, 튜링 테스트 첫 통과… "사람보다 더 사람 같네"”, 조선일보, 2025.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