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발터 벤야민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다만 내가 읽은 벤야민은 언제나 누군가 해석해 놓은 벤야민이었다.
대학교 때 우연히 접한 벤야민의 이론에 반해 집에 벤야민의 책을 몇 권 비치 해두기는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는 과정에서 그의 책을 펼쳐 본격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래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접한 벤야민 이론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누군가 해석하거나 인용된 벤야민의 이론만 두고 보았을 때, 벤야민은 매우 논리적이고 혁신적인 이론가였다. 내가 벤야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곤 해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인용된다는 사실로 인해, 이 것은 아마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오늘 소개할 '고독의 이야기'를 신청하게 된 것도 벤야민의 논리정연하고 혁신적인 부분과 잘 매치되지는 않아서다. 창작자보다는 평론가의 이미지에 가까웠던 발터 벤야민이 '문학작품'을 썼다는 사실은 아직도 기묘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론가 벤야민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문학가 벤야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은 벤야민의 이론들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벤야민이 소설을 쓴다면 어떤 소설을 쓸까? 객체와 관찰자 간 흐르는 묘한 소외의 문제가 등장인물의 탈을 쓰고 창의적인 상황을 묘사할까, 아니면 관찰자의 독백으로 가득 차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상상한 방향으로 쓰이지 않았다. 단편집은, 크게 주제에 따라 3부로 나뉘어져 있고 각 부에는 적게는 반장, 길게는 열 장 아래의 짤막한 단편이나 서평이 수록되어 있다. 주제를 구분하긴 했지만, 읽는 입장에서 그 구분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각 글이 쓰이는 방식이 사실에 기반하는지, 상상에 기반하는지 알 수 없는 데다 명확한 서사적, 논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쓰인 방식이 독해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나는 이 책을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애당초 당장 내가 가지고 있는 벤야민과 관련된 지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글을 쓰는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인적인 이유 하나, 벤야민의 글이 가진 이유 하나로 그 이유를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나는 벤야민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원전에서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현대인이 지식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만, 글을 읽지 않았기에 벤야민의 사고 흐름, 문체, 사고를 시작하고 완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의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공상과 몽상, 놀이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책의 글을 쓴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어떤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논리적 연결성은 모호한 짧은 백일몽 같은 글들은 짧은 공상이나 꿈을 닮았다. 해체에서 정신분석과 관련된 언급이 있어 이 부분을 중심으로 '이 글의 독해가 가능한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비평을 위한 정신분석은 다를지 몰라도, 일반적인 정신분석에서 꿈은 다양한 내적 정신 구조의 영향을 받는 복잡한 정신 표상 덩어리다. 꿈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완결되지 않고 열린 상태로 두었다가 피분석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그래서 꿈 분석은 피분석자와 분석자의 반응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과정에서 조심스럽고, 포화하지 않은 상태로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 책은 '정신분석'이라는 복잡한 장이 아닌,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서 놓여있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 책을 오독하고 해체할 권리이자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일반적인 소설보다는 꿈에 가깝기 때문에, 꿈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리, 열쇠, 지하실은 그의 정신세계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해석말이다.
하지만 더더욱 이 문학적 글들이 벤야민의 '꿈'에 가깝다면, 나는 이것을 해석할 수 없다. 나는 벤야민을 모르고, 벤야민은 나의 해석에 반응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꿈들이 그가 어떤 삶을 지날 때 꾸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은 불가능한 지경에 놓여있다. 내가 이 지점에서 느낀 좌절감은 꽤 상당했다. 글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와 이미지를 따라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독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턱없이 부족한 지식 구조를 가진 독자-대중-로서 느끼는 솔직한 감상은, 이 책이 단편집이 아니라 인용되어 평론으로 출간되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이 책은 '벤야민을 이해한다'라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벤야민을 이해하는 사람의 이해의 근거를 제공한다'에 가깝기 때문이다.
책에는 벤야민의 이론의 발상지로 추정되는 부분이 발견되지만, 일반적으로 자세한 부분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에게는 공허한 이야기로 들릴 가능성이 있다. 평론만큼 쓰기 어려운 것이 세상에 어디 있나 싶긴 하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정말로 그런 책이 출간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트인사이트 내에서 이 책이 끌은 인기를 생각하면, 벤야민은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싶은 학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이 책의 독해가 어려운 이유를 텍스트의 구조 자체로 분석해 보려 한다. 둘째, 벤야민은 '소설의 구조'를 답습하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앞선 이유에서 구구절절 이야기했듯, 이 책은 나에게 '꿈'을 강하게 연상시켰다. 나에게 꿈은 명확한 원칙에 의해 발달하고 만들어지지만, 의식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책은 의식을 통해 사고하며 이해하는 텍스트와 다른 방식의 감상을 준다.
많은 독자가 이야기에서 어떤 메시지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 책은 어떠한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작가의 의도나 세계관을 아주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전달받을 수 있다. '고독의 이야기들'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독하다. 작가는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편협하고 고립된 어조로 글을 전개한다. 그래서 독자는 이 책을 읽어 나가는 동안 고립된 기분을 느낀다.
벤야민은 왜 이러한 형태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을까? 개인적으로는 각 에피소드의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위해 책장을 넘겼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에 벤야민의 문학작품만큼이나 지지부진하고 반복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미완으로 남겨진 카프카의 '성'을 매우 재미있게 읽은 사람으로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야기는 어떻게 전달되어야하는가"에 대해 질문한 벤야민의 질문은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미완으로 남은 것 같은 이야기들을 다시 되돌아보는 이 글도 미완으로 남기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