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 날의 하늘과 닮아있다.
첫만남의 기억
나는 아홉 살 때부터 동네 야구를 즐겼다. 2006년이었고, 야구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해였다. 축구 월드컵의 아성에 도전한 국제 야구대회가 처음으로 열린 년도이기 때문이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줄여서 WBC. 아마추어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전의 국제 대회와 달리, WBC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주관한 대회였기에 그동안 국제 대회 참가에 소극적이던 메이저리거들도 대거 출사표를 내고 WBC에 참가했다.
초대 대회였기에 우리나라는 물론, 야구를 즐기는 전 세계인들이 주목했다. ‘메이저리거들이 나라를 대표하면 어떤 성적을 거둘까?’ 라는 궁금증이 실현되는 대회, 온갖 괴수들이 모여 각자의 실력을 뽐내는 자리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야구 강국들을 줄줄이 꺾고 승승장구했다. 대만은 우리와 대등한 상대로 여겼기에 어느 정도 가능한 시나리오였지만, 멕시코, 미국, 일본을 꺾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란이었다.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최종 성적 3위를 기록했다. 이 성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비참한 성적을 연이어 기록 중인 현재의 야구 대표팀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2025년 기준, 한국 야구 대표팀은 3개 대회 연속으로 조별 탈락을 해 본선 라운드가 열리는 미국 땅조차 밟지 못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러한 부진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야구의 비관적인 미래를 떠들면 밑도 끝도 없으니, 여기까지만 하고 다시 돌아와서. 어쨌든, 그 당시 야구 대표팀의 호성적에 힘입어 내가 살던 동네에도 야구 붐이 일었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야구를 할 생각에 설레어 헐레벌떡 집으로 가 책가방을 던져두고 글러브와 배트를 챙겨 아파트 공터로 향했다.
공터는 야구를 하기에 정말 좁았다. 실내화 주머니로 홈, 1루, 2루, 3루를 표시하면 남는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2루 바로 뒤가 곧 담장이었다. 공터 뒤 분리수거장에 떨어지면 인정 2루타, 주차장까지 넘기면 홈런. 이런 나름의 로컬 룰도 존재했다. 그런 곳에서 야구를 신나게 했다. 공이 공터 왼쪽 난간을 넘어가면 한참 아래에 있는 공원으로 곧잘 떨어졌기에 딱딱하고 비싼 야구공을 쓸 수조차 없었다. 어린 우리는 공터 뒤에서 테니스를 치던 아저씨들에게 헤져서 못 쓰는 테니스공을 받아와 야구를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야구를 했던 것 같다.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아 매번 하위 타순에 들어갔고, 시키는 포지션만 했는데도 좋다고 형들을 따라다니며 해가 질때까지 공터를 지켰다.
그때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 동대문운동장역일 시절이었다. 역사 이름의 변천에서 엿볼 수 있듯, 역 근처에는 동대문야구장이 웅장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당시 서울시는 패션 성지를 만들겠다는 이유로 –무려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야구 성지를 무참히 철거해버렸다. 야구장 주변에는 체육사, 스포츠 용품점이 여러 있었다. 아빠는 야구의 재미에 빠진 나를 동대문으로 데리고 가 글러브 두 개와 작은 나무 배트 하나를 사주었다. 나는 그때 산 나무 배트에 글러브 두 개를 꿰고 온 동네를 해가 질 때까지 쏘다녔다. 야구를 하지 않더라도, 글러브와 배트는 언제나 함께였다.
그때 어린 나의 손은 너무나 작아 글러브를 꼈다는 표현보다 애처롭게 들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배트는 어찌나 무거운지, 스윙을 할 때 마다 온 몸이 휘청거렸다. 매번 공을 놓치고, 삼진을 먹었다. 공이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가고 난 뒤였지만, 나의 배트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야구를 했다. 파울조차 치지 못해도 나는 늘 타석에 섰다. -이런 실력인데도 나를 계속 끼워준 동네 형들에게 이제야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러다 한번. 정말 어쩌다 한번. 하늘 높이 공을 쏘아올린 적이 있었다. 기념비적이었기에, 그 날의 하늘과 대기의 습도가 아직도 생생하다. 축축한 여름이었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적이었다. 투수의 얼굴도, 공도 잘 보이지 않았다. 슬슬 저녁을 먹자며 엄마들이 직접 아이들을 데리러오고 있었다. 나도 배가 고파져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심산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가 공을 던지자마자 나는 스윙을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가로등이 켜져 인위적인 형광이 눈을 에워쌌다. 시각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촉감으로는 난생 처음 접한 감각을 느꼈다. 퉁- 하고 맞고,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청명한 소리와 대비되는 공허한 손의 감촉.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였다. 가장 배트에 공이 잘 맞았을 때, 역설적으로 아무 감각이 없다는. 한 거포 1루수가 밝힌 홈런의 감각이었다.
내가 친 공은 자홍색으로 물든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어디론가, 재빨리 사라졌다. 나는 프로야구 1호 홈런을 날린 이만수처럼, 펄쩍 뛰며 공터를 돌았다. 홈런볼을 주워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손맛을 기억한 채로 얼른 내일을 맞이해 새로운 타석에 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땐, 행복을 거머쥐는 것이 정말 쉬웠다. 배트와 글러브, 그리고 공만 있으면 하루 종일 뛰어 놀 수 있었다. 이기고 지는 건 상관없었다. 야구라는 스포츠. 그 자체를 마음껏 향유했다.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야구를 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이너스 NO.54 김승현
감독은 물 위의 백조 같은 존재
야구 감독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팔짱을 낀 채 종종 찾아오는 코치들에게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뚱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감독들을 보고 있노라면 몰래 다가가 ‘몸에 힘 좀 빼시죠’라고 너스레를 떨고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멋져 보이기도 했다. 감독의 말 한마디에 선수들이 꼼짝 못하고,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 사인을 보내면 기계가 움직이듯, 수비 시프트가 척척 움직이는 장면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스포츠 팀을 이끄는 감독. 이들은 영화감독처럼 ‘Director’가 아닌, ‘Manager’, 다른 종목에서는 ‘Headcoach’로 불리며 팀의 리더로 군림한다. -영어로 야구감독은 ‘Manager’, 다른 종목의 감독은 ‘Headcoach’로 호칭되는데 이 차이에 대해서는 추후 기술하겠다.-
이들은 다른 집단의 리더들보다 훨씬 권위적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스포츠 기사를 볼 때, ‘선수단 장악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감독이 팀을 얼마나 잘 단합시켰는지 평가하는 지표인데, 이 용어 자체가 스포츠 팀 리더의 권위성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팀장의 인사고과를 진행할 때 ‘부서원 장악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듯, 강한 통솔력과 장악력은 스포츠 팀을 이끄는 수장에게 요구되는 특이한 덕목이다.
사실, 누군가의 지시를 군말 없이 따르며 복종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 굉장히 불합리한 행동 방식이다. 국가도 법의 테두리 안이라면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어하지 않지만, -할 명분도 없긴 하다.-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각종 규율을 지킨다. 선수가 감독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한번쯤 깊게 생각해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왜 사람이 사람의 명령에 따를까. 홈런을 쳐내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 채 작전대로 번트를 대며 자신을 희생할까.
이런 암묵적인 순응의 이면에는 ‘승리’라는 스포츠의 본질적인 목표가 담겨있다. 엄밀히 따져보면, 선수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승리가 아니다. 선수가 달성해야할 목표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 선제되어야 하는 성과다.
4번 타자가 아무리 홈런을 뻥뻥 때려대도, 선발투수가 완투를 해도. 상대팀이 더 많은 홈런을 치고, 상대 투수가 완봉을 하면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이렇게 패배를 거둔다면, 멀티 홈런을 때려낸 4번 타자와 완투패를 한 투수의 잘못인가? 아니다. 패배했을지언정, 그들은 선수로서 주어진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다.
반면, 감독에게 요구되는 결과물은 선수의 것과 다르다. 경쟁의 산물은 오로지 승리와 패배, 두 가지로 나뉘기에 스포츠 팀은 철저히 승리를 거두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고용, 임명한 총 책임자가 바로 감독이다.
아무리 특급 선수들을 거느려도,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당연히 감독의 책임이다. 리빌딩 중인 팀의 감독을 맡은 경우에는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리빌딩* 중이라고 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아 잘려나가는 감독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리빌딩: 선수단 쇄신을 위해 유망주들을 중용하여 미래의 성적을 기대하는 팀 운영 방식. 당장의 성적보다 선수 육성이 우선이기에 부진을 겪는 경우가 많다.
감독들은 항상 승리에 대한 압박감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그들의 마음은 늘 불안하다. 감독 목숨은 곧잘 파리 목숨에 비유되곤 하는데, 그만큼 팀의 성적에 대해 큰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선수야 자기 할 일만 충실히 수행하면 돈 값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만, 감독들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고한 척하지만, 짙은 선글라스 안의 눈망울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중대한 책임을 지는 감독직을 내가 맡게 되었다. 우리는 아마추어고, 학교 동아리일 뿐이고, 돈 받고 하는 게 아니고…, 라는 말들은 전혀 내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대학 동아리 야구여도 성적이 나지 않을 때 분위기가 침울해지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경기수가 적다보니 경기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많아 승리를 거두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
저번 편에서 말했듯, 내가 감독을 맡기 직전 년도에 우리 팀은 전패를 당했다. 분위기를 환기할 기회도 없이 무기력하게 1년을 보냈다. 감독이라면 당연히 승리를 좇아야하는 것이 맞지만, 나는 누구보다 더욱 승리를 갈구하며 훈련 계획을 짰다. 그때의 팀 상태는 마음의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1부터 10까지, A부터 Z까지 전부 갈아엎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