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결의, 삼고초려, 적벽대전. 삼국지의 가장 대표적이고 익숙한 장면들이다. 학교 수업 시간에 잠깐씩 스쳐 지나가고, 일상 속에서 비유로 종종 쓰이며, TV 프로그램의 퀴즈 코너에서 한 번쯤은 본 적 있는 장면들, 아마 대한민국에 산다면 이 세 장면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어렵지 않을까? 그만큼 ‘상식’이라 불릴 만큼 익숙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내용 전체를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는 드문 것이 바로 삼국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고 산다. 인물 이름과 굵직한 사건 몇 가지는 알고 있었지만 삼국지의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가 한국의 뮤지컬로 재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특히, 그 뮤지컬이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것은 예상도 못했기 때문에 그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뮤지컬 <적벽>은 중앙대학교 학부 워크숍에서 출발하여 정동극장에서 정식 제작되었고, 무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다듬어져왔다. 그렇게 해서 올해 여섯 번째 버전, ‘육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 장면에서 시작해, 적벽대전을 거쳐 삼형제가 마지막으로 함께 전장을 바라보며 함께 죽을 것에 대한 맹세를 다지는 순간까지를 따라간다. <적벽>은 전통 판소리와 부채춤, 현대무용이 결합되어 시대를 초월하는 감각을 무대 위에 구현하고 있었으며, 고전적 서사에 전통의 아름다움, 그리고 현대의 감각적인 연출을 불어넣으며 극 전체를 끌고 나가고 있었다.
여백의 미, 공간의 비움
극장에 들어서고, 객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무대의 구성이었다. 특별히 화려하거나 시선을 끌려는 장치 없이, 오히려 철저하게 '여백'과 ‘비움’으로서 공간이 채워져 있었다. 1층과 2층으로 나뉜 구조는 마치 고요한 백지처럼, 전체적으로 흰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무대 어디에서도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었던 이러한 간결하면서도 품위 있는 무대 구성은 평소 화려한 무대의 뮤지컬을 봐온 나에게 무척 색다르게 다가왔다.
1층 무대 중앙에는 깊게 들어간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반적인 뮤지컬에서 오케스트라 피트가 가려져 있거나 무대 뒤편에 배치되는 것과 달리, 이번 공연에서는 연주자가 무대의 중심에 ‘보여지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고, 오히려 공연에 몰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양식 오케스트라와는 결이 다른, 판소리 뮤지컬 특유의 사운드가 끊임없이 배경을 채우고 있었고, 그 소리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극을 보는 내내 나에게 큰 만족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연주자들이 단순히 배경 음악을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연 중간중간 직접 무대 위로 이끌려 나와 배우들과 함께 장면을 만들어나갔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들마다 음악은 단순한 반주를 넘어서 하나의 ‘등장인물’이 되어 각 순간마다 관람객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무대는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2층에는 최대 4명 정도의 배우만이 올라갔다. 처음에는 이렇게 간단한 구조가 공간의 분리를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실제로 공연이 시작되자 그러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배우들이 1층과 2층을 오르내리는 동선 자체가 하나의 안무처럼 구성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양쪽 벽면에 설치된 계단마저도 무대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렇게 무대는 총 네 개의 분리된 공간으로 확장되었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배우들이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는 장면조차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감정을 전하는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었기에, 관객인 나로서는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지켜보게 되었다.
'캐릭터성'의 시초는 삼국지에 있었다
무대 위에 선 유비, 관우, 장비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모두 익히 알고 있었던 이름이었고 2D로 그림이 그려진 것은 자주 보았다. 하지만 실제 인물이 분장하여 나의 눈 앞에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을 주었다. 특히 세 사람의 캐릭터성이 뚜렷하게 대비되었는데, 이러한 캐릭터성은 지금의 콘텐츠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캐릭터의 설정들의 '근본'이 되고 있었다.
유비는 여성 배우가 연기했다. 유비는 유순하면서도 신중했고, 따뜻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부드러운 리더의 면모를 갖고 있는 캐릭터다. 언제나 너그럽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 유비는 ‘정리’의 역할을 맡고 있었고,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공존하는 그 모습을 보며 여성으로서의 유비에 대한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관우는 부드러운 유비 아래에 서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캐릭터다. 그는 뮤지컬이 진행되는 내내 진중하고 과묵하며,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의리'를 위해 조조를 놓쳐주는 장면에서 조조와 함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수가 거의 없다. 관람객들은 무대 위에서 그의 앞모습과 목소리보다는, 그의 진중한 뒷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관객을 등진 채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더 큰 무게감과 존재감을 자아냈다.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지 않아도, 그 뒷모습에서 관우의 신념과 결의가 느껴졌다. 정적인 움직임 속에서도 그 자신만의 강인함이 묻어나왔고, 그 고요함은 곧 힘이었다.
내가 가장 유쾌하고 즐겁게 본 캐릭터는 바로 장비였다. 무대 위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고, 동시에 어떻게 보면 나와도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호탕한 웃음소리, 웅크린 자세, 껑충껑충 뛰는 걸음걸이까지 세 캐릭터 중에서도 유독 과장된 모습이 강하고, 모든 동작에서 장비 특유의 기질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만화 속의 캐릭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매번 리액션이 크고 호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나에게는 유독 더 눈길이 끌리는 캐릭터였다.
그 외에도 인상 깊었던 캐릭터가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조자룡이었다. 등장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남녀백성들아, 미부인을 보지 못하였느냐!" 라는 날카롭고 또렷한 외침과 함께 무대에 등장하는 그 장면은, 비록 길지 않은 장면임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짧은 순간에도 캐릭터의 단단함이 뚜렷이 드러났고, 날카로운 시선과 단정한 움직임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특히 <적벽>에서 조자룡 역은 여성 배우가 맡고 있었는데, 해당 배우의 날카로우면서도 정의로운 이미지가 조자룡의 매력을 더욱 극대화 시키고 있었다.
뮤지컬 <적벽>의 메인 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조조는 이번에 유독 야비하게 묘사되었는데, 장비 다음으로 그 캐릭터성이 무척 깊게 느껴진 캐릭터였다. 싸울 때는 강인한 척 하면서도 지고 나서는 누구보다도 찌질해졌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뜻을 이루고 난 다음 언제 자신이 찌질하게 굴었냐는 듯 하이톤으로 비웃는 배우의 연기는 조조의 뱀과 같은 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부드럽고 정의로운 유비와 묵묵하고 우직한 관우, 호탕하고 강렬한 장비와 뱀과 같이 야비한 조조까지, 이 모든 캐릭터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콘텐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들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캐릭터성의 근본은 삼국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현대무용과 부채춤의 조화
뮤지컬을 볼 때, 얼마나 화려한 소품들이 나오는지가 뮤지컬의 완성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될 때가 있다. 하지만 막상 나의 마음을 울린 것은 얼마나 소품이 화려하고 많은지, 얼마나 크고 실감나는지가 아니었다. 얼마나 무대를 가득 채우면서 관람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의 상상력을 가득 채우는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적벽>은 나의 마음 속에서 몇 번이나 전율을 일으켰는지 세어볼 수도 없다. 오직 부채하는 요소만을 활용해서 무대 위는 바다가 되기도 하고, 활이 쏘아지는 전장이 되어지기도 했으면서, 비가 오는 날의 처마 밑이자 가파르고 위태로운 절벽이기도 했다. 배우들이 부채를 펼칠 때마다 무대 위는 풍성하게 부채의 형태가 채워졌고, 이것은 새로운 실루엣을 만들며 관람객들에게 상상력을 가득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부채를 활용한 배우들의 움직임은 절도 있는 동시에 강물처럼 부드러웠는데, 이러한 배우들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움직임이 무대 위에서 '춤'으로 재해석 되었을 떄 얼마나 큰 힘을 담고 관람객들에게 다가가는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멋있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들은 무대 위에서, 그리고 동시에 나의 눈 앞에서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현실적인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관람객의 몰입도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경이로움을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마무리 지으며
삼국지는 오래전부터 ‘교양’이라 불려왔다. 그만큼 익숙하고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그렇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삼국지가 어떤 이야기였는지를 나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이름만 알고, 몇몇 장면만 기억하고, 그렇게 아는 듯 마는 듯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적벽>이라는 공연을 통해 나는 다시 삼국지를 ‘즐겁게’ 마주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삼국지 전체를 이 공연의 흐름으로, 끝까지 이어서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는 것이 사실이다. <적벽>은 삼국지의 이야기에서나 나에게 삼국지로서나 그 시작에 불과했지만, 이미 충분히 강렬한 첫 장으로 삼국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불태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