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의 재밌는 점은 여러 개가 있지만, 개중 아직도 진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학과 수업의 일환으로 판소리 전승 답사를 다녀왔던 일이다. 고전 중에서도 구비 전승 문학을 배우는 전공 수업에선 방학에 시간을 맞추어 수강생들 전원이 전라북도 남원으로 답사를 떠났다. 물론 나의 답사 일지는 막걸리 엔딩이 나버렸지만, 그러니까 수업보다는 술에 정신이 팔려 숙취 탓에 제대로 기억나지 않음서도 무척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전공 수업으로 고전 문학을 접하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허나 짧은 학식으로서 말하기는 참으로 뭣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한국 고전 문학 텍스트는 서사 자체에서 큰 흥미를 느낀다고는 말 못하겠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거진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납작한 서사 구조에 큰 매력을 느낄 리야. 하지만 봄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5교시 강의실에 앉아, 점심에 이미 막걸리를 거나하게 잡수신 노교수님의 고전 문학 강독은 그저 순수하게 즐거울 일이다. 풀린 혓바닥으로 느긋하니 읊어두시는, 고전 텍스트의 생소한 어휘들과 그 말맛이 참으로 듣기에 좋더라.
지금에야 사양 길에 접어든 사어 (死語)로서 써보련들 도저히 써먹을 수가 없었지마는, 옛말에는 특유의 고소하고도 고상한 맛이 배어 있다. 지금에 찾아보기 어려운, 고지식하고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고귀한 말맛이. 가볍고 편리하며 유쾌한 말보다 한없이 무겁고 진중하며 짐짓 젠체하는 듯한 그 말들이, 붓으로 강하게 내리찍어 누른 백지 위로 뭉근히 스며드는, 먹과 같은 그 어휘들이 나는 좋았다. 하여 4년 내내 들어온 고어(古語)의 고릿한 향기는 내 언어의 몸체로 스며들어왔다.
오늘의 공연은 ‘적벽’이다. 이는 다들 예상하시듯 삼국지연의 중 적벽대전에 관한 내용이요, 그중에서도 판소리 ‘적벽가’에 직접 뿌리둔 것으로, 판소리 창극의 현대식 어레인지 작품이다. 처음엔 텍스트와 가창 방식은 판소리 원전을, 무대 연출과 무용은 뮤지컬의 그것을 차용하고 있노라 생각했으나, 곧 그것이 창극이라 불리는 고유한 유형의 기예임을 알게 되었다.
판소리의 세부 갈래야 그 많겠지마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은 고수와 소리꾼 단 두 명으로 이루어진 양식으로, 무대 구성이 매우 단출하다. 고수의 북소리와 추임새를 제외하고서는 무대의 너른 공간을 모조리 소리꾼의 소리만으로 채우는 예술로서,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현대의 공연 예술에 비하자면 한없이 정적이라. 할아버지 말씸 같은 소리꾼의 아니리, 뒤이어 홀로이 박자를 타는 북의 외론 소리 위로 종횡무진 변모하는 굴곡진 가락이 참으로 멋스럽다. 어딘가 호젓한 여백의 미와 일당백 당찬 구성이 물씬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장르이다.
한편, 현대에 와서는 기악으로 멜로디를 형성하는 듯한 변화 양상도 보이고 있으니, 북소리만으로 가창을 뒷받치던 기존의 양식과는 다른 맛과 멋을 보여준다. 1인 가창의 장점이자 단점인 소리의 빈공간을 현대 악기의 가락으로 채워 듦이니 그 구성이 퍽 옴팡지다. 본 글에는 그 영상의 참조가 불가해 이하 고준석 소리꾼의 다른 영상을 첨부하였지만, 국립민속국악원의 공식 영상 중 고준석이 가창한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을 찾아보시길 강렬히 당부드린다. 판소리 적벽가는 창극 ‘적벽’과 달리 소리꾼의 솜씨를 온전히 느껴볼 수 있었는데, 이하 첨부한 창극 ‘적벽’의 영상과 비교해보는 것도 여러분께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안기리다. (영상 1분 25초 ~ 1분 59초)
반면 창극은 가창의 형식만을 판소리와 같이 할 뿐, 여러 기악으로 가창을 뒷받침하는 멜로디를 형성하고 여러 명의 창부가 나와 각자의 인물을 연기하며 더러 적극 안무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판소리와 그 맥을 적이 달리한다. 본극 ‘적벽’은 판소리 적벽가를 뮤지컬의 형태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창극 적벽가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를 채 몰라 썼던 원고를 다 갈아엎은 것이 애석타.
‘적벽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판소리 마당 중 하나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중국 고대사, 정확히는 그를 바탕으로 두는 소설인 삼국지연의를 원전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다른 마당, 예컨대는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와 같이 내로라하는 유명 마당들이 국내 고전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에 비하자면 분명 대조적이다.
그 내용이야 하 유명하니 씬의 대주제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다들 대중 짐작하시리다. 도원결의, 삼고초려, 장비의 장판파, 제갈량의 기풍제와 동남풍, 적벽대전, 조조군의 퇴각, 화용도와 관우의 아량, 군법 회의와 형제의 의. 보시다시피 이는 촉한 진영인 유비의 시점에서 다루어진 삼국 연의이다.
이리 말하면 어찌들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그 서사에 새로울 것이 있을쏘냐. 자랄 제 이미 십 수 번을 더 들은 내용이요, 이 또한 각색하야 조조를 온통 악인으로, 유비를 흠결 없는 성인군자 일변으로 묘사하였으니 서사의 구조는 익히 평면적이라. 익숙한 것에서도 카타르시스쯤이야 왜 안 느끼겠느냐마는, 적벽가는 서사 자체의 신선함보다 말의 맛이 일품인 작품이다. 익숙한 내용을 창으로 구전하니 그 맛이 새로와 좋다. 끝없이 등장하는 생소하고도 고절한 한자어 표현쯤은 배경지식으로 덮어버릴 수 있으니 더욱 좋다.
위 영상을 보아 아시겠지마는 창극 ‘적벽’의 또 다른 장점은 무대 연출 및 앙상블과 안무의 활용이다. 빔프로젝트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각 씬의 안내와 몰입을 돕고, 소품은 간소히 활용하였으나 이를 통해 인물들의 동선과 위상, 심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창부 다수가 등장하여 앙상블을 이루니 청각적 즐거움에 규모가 주는 감동이 배가되고, 큰 움직임을 동반하는 안무와 군무는 시각적 쾌감을 일으킨다. 이는 다른 창극 적벽가 영상에 비하여서도 진일보한 연출적 결실이다.
뿐 아니라 ‘적벽’은 적절한 축소와 요약 각색을 통해 기나긴 관람 시간에 수반되는 관객의 피로를 교묘히 피해 간다. 판소리 적벽가는 총 3시간의 길이로, 느긋한 말의 속도와 내용의 방대함이 현대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요소일진데, ‘적벽’은 서사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과 필수적인 내용을 제하고선 과감히 생략하였으니, 이는 위의 판소리 영상과 창극 영상을 비교해 보아도 대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적벽’의 총 관람 시간이 100분을 넘지 않으니 관람 후 피로 없이 거뜬하였고, 기꺼운 재방문 의사를 일게 한다. 물론 그 결과 서사 전개 간에 빈 공간은 필연이 발생하겠으나, 이 또한 앞서 말하였듯 널리 알려진 원전을 토대로 하므로 참작 가능하리다.
얼마나 잘- 보고 왔으면 리뷰가 이리 칭찬 일색인가, 나부터가 아연한데 즐거워 한껏 들뜬 가슴의 경망스러움이 며칠을 가는 걸 보면, 빠져도 단단히 빠진 듯하다. 덕분에 이리 리뷰를 쓰는 동안 판소리와 창극에의 오래질 관심이 생기었으니, 바라 건대는 정동 극장을 위시로 더 많은 현대 판소리와 창극 작품이 우릴 찾아주었으면. 창극 ‘적벽’은 3월 13일부터 4월 20일까지, 국립 정동극장에서 절찬리 공연하니 여러분께도 자신 있게 관람을 추천해 드린다. 오늘의 공연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