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이 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소울>에 나오던 '22'였다. 개봉 당시에도 인상 깊게 봤던 영화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어졌다.
주인공 '조'는 불의의 사고로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져, 오랫동안 태어나지 못하고 있던 영혼 '22'를 만나게 된다. 픽사의 22번째 작품이라서 그 영혼의 번호는 22가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마음대로 내 나이에 대입해 생각하기로 했다. 사고뭉치 22를 쫓아다니며 시종일관 '트웬티 투!'를 외치는 조의 목소리가 꼭 나를 향하는 듯하다.
<소울>의 세계관에서 영혼들은 나만의 성격 6개와 불꽃 하나를 찾아야만 지구로 가서 태어날 수 있다. 똑같이 태어났는데 저마다 재능도, 흥미도 다 다른 사람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새삼 신기한 일이다.
나는 어떤 성격과 불꽃을 갖고 태어났을까. 트웬티 투, 스물둘!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의 성격과 성향
우선 나는 무던한 사람이다.
'성질이 너그럽고 수더분하다'라는 뜻의 '무던하다'가 내 성격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형용사 같다. 특별히 나서고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많이 알아갈수록 내가 감정 기복이 정말 없는 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애늙은이 소리를 듣기는 했다) 최근 유일하게 분노를 느끼는 건 지하철에서인데, 그래도 환승하다 꽃집을 지날 때 생화 향기가 확 풍기면 다시 웃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평상시 나라는 사람은 온도가 낮고 차분하다. 그 흔한 대학생들의 음주 문화도 내게는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렇다고 놀 줄 모르는 사람이라 치부하면 서운한 것이, 내 세상에는 또 나만의 재미가 가득하다.
나의 취미는 좋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 대학로의 지하 소극장에서 아름다운 연극을 만나는 것. 한가한 날이면 동네 도서관에 가서 하염없이 책을 읽는 것.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고 천변을 걷는 것. 소파에 몸을 묻고 가족들과 매일 수다를 떠는 것. 가까운 친구들과 가끔 맛있는 걸 먹고 차 한잔을 하는 것.
거창하고 화려한 것보단 늘 순수하고 소박한 것들에 마음이 간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좋아한다는 말이 더 와닿는다. 영화로 치면 짐 자무쉬 감독의 스타일, 음악으로 치면 인디라고 분류되는 것들이 좋다. 나의 온도는 그런 것들로 둘러싸여 있을 때 올라간다. 조용히 달아오른다. 아트인사이트에서 공유하는 오피니언들에는 나의 가장 따뜻한 순간들이 담긴 셈이다.
나의 불꽃
내 삶의 불꽃은 문학이다. 시, 소설은 물론 영화, 연극, 음악 같은 것도 결국은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차갑고 잔잔하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나를 삶으로 조금씩 밀어내주는 무언가를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문학뿐이다.
국제고에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모순적인 결과도 그 확신 때문이었다. 10대 땐 문학을 그렇게 사랑하기만 했는데, 어느덧 고학년에 접어든 지금은 사랑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한다. 문학은 여리고 감성적인 것이라는 관념이 싫어서 문학소녀라는 말이 늘 싫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아주 강하고 처절한 것이다. 문학을 읽는 건 슬픈 사람이고, 문학을 쓰는 건 아픈 사람인 것만 같다.
그러다가도 또 사랑과 증오는 어쩌면 같은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싫다면 그냥 싫다고 하고 말지, 굳이 증오한다고까지는 안 할 테니. 이 불꽃이 내 곁에서 은은하게 오래 일렁일지, 옷에 옮겨붙어 다 태워버릴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대단한 사랑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좋아한다. 그 별것 아닌 글 가루들이 그냥 좋다. 평생 곁에 두어도 질리지 않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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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하다'를 붙였을 때 단어가 되는 이름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유행처럼 돈 적이 있다. 너무나 평범한 내 이름을 별다른 기대도, 생각도 없이 검색해 보았을 때, '현진하다'라는 단어가 나왔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다', '나타나 나아가다'. 알고 보니 호전적인 이 동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조용히, 열심히 삶을 즐기며 흘러가고, 혼자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읽고 쓰는 사람인 나를 닮았다고 느꼈다.
나는 고요하지만 힘 있게 현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22년 차 영혼의 위치는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