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1인극의 시대다. 배우 한 명이 무대 전체를 책임지는 1인극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시기부터 소극장 무대에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코로나 시국에는 배우들끼리 접촉하는 경우를 방지하고, 인건비 절감 등의 이유로도 1인극이 선호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종식된 지 2년이 넘은 현재도 1인극은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1인극이 지금도 관객의 선택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대에 서는 배우의 실력과 내공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더 라스트맨>, <온 더 비트>, <일리아드>, <내게 빛나는 모든 것>, <웨딩플레이어>,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그라운디드>, <전락> 등 많은 1인극들이 팬데믹 시기부터 현재까지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을 만났다. 그 중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더 라스트맨>, <일리아드>, <내게 빛나는 모든 것>, <웨딩플레이어>는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했다. 2025년 봄,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연극 <지킬 앤 하이드> 또한 젠더프리 캐스팅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인 극을 꾸준히 제작해 사랑받는 제작사 HJ컬쳐에서도 최근 1인극을 올렸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원작이자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알레산드로 바리코’ 희곡을 원작으로 한 1인극 <노베첸토>가 2025년 3월 19일,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개막했다. <노베첸토>는 1900년,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배에서 발견돼 한 번도 육지를 밟지 않고 세상을 떠난 천재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의 일생을 다룬 1인극이자 음악극이다.
<노베첸토>는 3월 19일부터 6월 8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 공연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화자인 ‘팀 투니’ 및 주인공 ‘노베첸토’ 외 다역엔 오만석, 주민진, 유승현, 강찬이 캐스팅됐다. 천재 피아니스트 노베첸토 및 그와 대결을 펼치는 재즈의 신 ‘젤리 모턴’의 피아노 연주를 맡은 피아니스트 김여랑과 조영훈도 함께 무대에 오른다.
1인극 중엔 소품과 세트를 최소화하고 텍스트와 연출, 배우의 연기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극도 많다. 반대로 <노베첸토>는 다양한 무대 세트와 소품, 또한 배우 못지않게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피아노 연주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극은 원작 희곡(원작부터 독백체로 쓰였기 때문에 무대화를 염두에 두고 창작된 작품이다)의 흐름을 주로 따르면서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연상되는 장면도 있다.
음악극의 성격도 강한 작품이라 배우는 트럼펫 연주를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심지어 소품에 그림까지 그린다. 관객으로선 이런 풍성한 연출 덕에 눈과 귀가 즐겁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배우에겐 연기 말고도 준비해야 될 게 많은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첫 공연인 3월 19일에는 오만석이 무대에 올랐다. 1999년 연극 <파우스트>로 데뷔한 오만석은 다수의 무대와 드라마, 영화 및 예능 프로그램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뮤지컬 <헤드윅>을 말할 것이다. <헤드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트랜스젠더가 된 동독 출신 락커 헤드윅의 인생과 사랑을 묵직한 서사와 강렬한 락 넘버로 풀어나간 락 뮤지컬이다. 오만석은 2005년 <헤드윅>으로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남우주연상과 인기스타상을 수상하며 <헤드윅>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들었다.
그 후 여러 무대에 오른 오만석은 <노베첸토>로 첫 1인극에 도전했다. 연기할 역할도 10개가 넘고, 춤과 트럼펫 연주, 그림까지 보여줘야 하는 작품이지만 그는 거뜬히 모든 롤을 소화해냈다. 화자 팀 투니로서 극을 이끌고 1열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 땐 <헤드윅>에서 돋보였던 극을 다루는 능력과 관객과의 소통 능력, 1인 다역에선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의 1인 다역 ‘다이스퀴스’가 떠올랐다. 엔딩에서 감정을 쏟아내는 연기를 할 땐 <더 드레서> ‘노먼’의 엔딩이 연상됐다.
그와 호흡을 맞춘 피아니스트 김여랑의 연주 또한 극을 압도했다. 노베첸토와 재즈의 신 젤리 모턴의 피아노 연주 배틀은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 장면에서 극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실력파 피아니스트 김여랑의 강렬한 연주가 가진 힘 덕분이었다.
평생 배에서만 살던 천재 피아니스트, 아름다운 재즈 피아노 선율, 호화 여객선, 전쟁, 다이너마이트, 폭발 등 작품은 강렬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후반부 극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몰입을 흐리게 만드는 잔잔한 연출과 어두운 조명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멀리서 볼 때 피아노를 형상화했단 걸 바로 알 수 있는 무대 미술 아이디어는 좋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볼 땐 장막처럼 드리워진 여러 개의 봉과 몇 개의 대형 세트들이 극에서 어떻게 이점으로 작용했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베첸토>는 한 사람의 인생을 묘사한 과정에서 화두를 던지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다. 노베첸토가 배에서 내리기로 결심한 건 한 농부를 만나고서였다.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후 배에 올라 바다를 처음 봤다. 파도 소리가 자신에게 ‘인생은 무한한 거야’라고 외치는 소리처럼 들렸다던 농부. 바다의 외침을 듣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는 농부의 말을 들은 ‘노베첸토’ 또한 평생 살아온 배를 떠나 육지에 발을 디디기로 결심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 삶의 ‘변곡점’을 스스로 만드는 걸 보여준단 점에서 작품은 상징하는 바가 많다.
배에서 태어난 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으나, 삶의 마지막은 스스로 선택한 천재 피아니스트 노베첸토. 누군가는 그를 배라는 작은 공간에 갇혀 88개라는 유한한 피아노 건반만을 연주해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노베첸토는 바다라는 광활한 공간 위에서 무한한 인생을 자유롭게 연주한 진정한 예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