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올라온 젊은 연출가.
생각해 보면 연출에게나 작가에게나 텅 빈 무대 위는 참 어색한 공간이다. 배우와 대사를 빌어 말하는 그들에게 빈 무대는 연필 없이 맞닥뜨린 시험지와 같다. 표현의 수단을 빼앗긴 작가에게 무대는 당혹감의 공간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그런 빈 무대 위에 덩그러니 올라와 위를 올려다보는 파랑의 모습이 나타난다. 불안한 붉은 빛에 둘러싸인 파랑의 주위에는 현이 있다.
신파랑은 실패한, 젊은 연출가이다.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고, 그럴 능력조차 없는 남자이다. 그가 연출한 <로봇의 죽음>은 망했고,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실감과 허무함을 마주한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최현은 그런 신파랑의 작가이다. 작가로서 현은 연출가의 생각과 내용을 글로 풀어내야 한다. 그러나 현과 파랑은 그다지 좋은 콤비가 아니다. 현은 파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보통 사람의 기준을 가지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작품. 현에게 파랑과 그의 작품은 난센스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무대 위의 파랑은 그런 그들의 공연이 끝난 직후의 파랑이다. 할 수 있는 표현을 다 해 보았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길을 잃은 메시지를 안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본다. 그는 이제 있을 곳이 마땅치 않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는 실패한 연출가이고, 무대 위에 내몰린 존재이다.
파랑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손을 들고, 천천히 움직인다. 멀리서 보면 춤 같이 보일 것이다. 신파랑의 언어가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은 신파랑을 이해하기까지.
<아득히 먼 춤>은 무대 위로 내몰린 연출가(파랑)와 무대 위로 올라서기 두려워하는 작가(현)를 담는다. 남은 것이 진심뿐인 쓸모없는 사람들을 두고 말하는 이 영화는 파랑의 이야기에 점차 다가가는 현의 모습을 이야기의 주요 골자로 삼는다. 현의 현재(졸업 공연으로 파랑과 함께한 유작 ’로봇의 춤‘ 다시 공연할 준비, 파랑의 집 정리)를 축으로, 현의 회상(파랑의 생전 모습)과 원작 '로봇의 죽음'의 소설 속 내용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제시된다.
파랑의 장례식을 찾은 현은 파랑의 부모님으로부터 파랑의 유품을 정리 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현은 내키지 않는 제의에 거절하지만, 부모님의 간곡한 부탁에 이내 수락한다. 동시에 파랑의 유작이자, 현의 졸업 작품으로 함께한 <로봇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한다. 학과 외부 공연이라서 졸업 요건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생전 신파랑은 졸업 요건을 채울 수 있는 공연이라고 했다. 현은 죽어서도 짐을 남기는 파랑이 너무나 싫다. 현은 이내 학과 내 故 신파랑 추모행사에서 <로봇의 죽음>을 공연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학과 내 행사인 만큼, 졸업 요건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단서를 달은 제의다. 현은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파랑의 죽음 이후 현은 파랑의 유작, 유품을 다루어야 한다. 반강제적으로 현은 파랑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
현은 생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파랑의 행동들을 구태여 다시 떠올려야 한다. 현은 답답함과 짜증을 느낀다. 다시 들여다본 기억들 안에서 파랑은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복기하는 과정은 그를 비 상식인으로 비추게 했다. 사회인으로서 능력도 쓸모도 없다. 이 남자는 현에게 그저 이상한 남자로 남았다.
이 남자와 함께했던 작품도 그랬다. <로봇의 죽음>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이었다. 에너지를 잃고 멸종할 위기에 놓인 로봇들이 사라진 인류학자를 찾아가 질문을 한다는 이 연극은 그 의도도 주제도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이 연극의 끝은 황당하다. 인류학자에게 로봇이 ‘멸망을 앞둔 우리는 뭘 해야 하나요?’라고 묻고, 인류학자는 ‘춤을 춰라’라고 답한다. 그리고 로봇들은 춤을 춘다. 이상한 엔딩이다.
신파랑 추모행사가 끝나고 허무하게 뜯어지는 신파랑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현은 이내 생각한다. 신파랑의 죽음이 이렇게 소비되는 것이 옳은가?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그들의 마음속에 작은 골짜기를 발견한다. 신파랑 이라는 궁지에 몰린 젊은 연출가의 모습은 깊고 진한 인상을 남긴다. 쉽게 메워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이해할 수 없는 그 골짜기는 사실 감정이 만든 골짜기다. 논리와 이성으로 쌓은 벽을 넘어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그 골짜기는 당혹스럽다. 파랑의 궤적을 따라가는 현이 마주한 골짜기는 관객의 그것보다도 더 당혹스러울 것이다. 카메라는 골을 마주하는 현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춤을 춘다는 것은.
두려움. 당혹감. 분노와 혐오. 단어에 담겨버린 이 감정들로 길을 잃은 현과 파랑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을까. 단정 지어진 모든 것들은 더 가까워질 가능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소통이란 서로의 도량형을 대고 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도량을 버리고 깎아내는 것일 테다.
그런데 그마저도 어렵다면. 이(異) 중 해(解)로 끝내 쪼개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면.
멀리 떨어져 보자. 힘을 빼고 서로의 원 궤도로 돌아가자. 아득히 멀어지면 다 비슷해 보일 것이다. 서로 비슷한 모든 것들은 각각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 차이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면 서로의 동작을 따라 추자. 저마다 제각각, 서로를 향해 추는 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