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은 나의 서른하고도 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평범하고 스무스하게 흘러간 2월 28일. 하마터면 생일을 올림픽처럼 4년마다 치를 뻔했던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나의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해서 생일에 좀 덤덤한 편이다. 만 나이에 세상 감사함을 느끼며 늘 그랬듯이 해오던 생일 의식을 치렀다. 식구들과 같이 치킨을 먹고 미역국은 먹었냐는 친구의 톡에 답장을 하며.
생일에 만난 저승사자
가족과 닭다리가 함께한 2월의 마지막날, 영화 <조 블랙의 사랑>도 함께했다. 우연찮게 만난 영화치고 꽤 반가웠던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인 윌리엄도 마침 65세 생일 파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알게 됐다. 그게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생일이었음을. 윌리엄은 알았을까? 어느 날 갑자기 건재한 자신의 삶 앞에 죽음이 드리울 거라고?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나도 생일날 밤에 저승사자를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사자와 인간이 서로 모종의 거래를 맺는데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평생을 바친 기업의 한 회장으로, 사랑스러운 두 딸의 아버지로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사는 윌리엄(안소니 홉킨스) 앞에 어느날 갑자기 저승사자가 나타난다. 자꾸만 귓가에 들리던 의문의 속삭임이 죽음에 대한 사전 고지였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절망에 빠진 그에게 저승사자가 신박한 제안을 해온다. “내게 인간 세상을 구경시켜 줘. 그러면 네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해줄게. 어때? 딜?” 윌리엄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딜!”
그런데 이 미스터리한 저승사자에게 실은 기막힌 사연이 있다. 이승을 돌아다니기 위해 교통사고가 난 어느 한 청년의 몸을 빌렸다는 것. 그 청년은 사고가 나기 전 윌리엄의 둘째 딸인 수잔(클레어 폴라니)과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적 있다는 것.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 강렬하게 이끌렸다는 것. 그걸 알리 없는 사자는 세상 구경에 열심일 뿐이다. 윌리엄을 졸졸 따라다니다 가족 식사 자리에 함께하게 된 저승사자는 얼떨결에 조 블랙(브래드 피트)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된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수잔을 다시 만난다.
이상하고 달콤한 이승의 맛
그가 ‘조 블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순간부터 상황은 재밌게 돌아간다. 조의 이승체험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치 호기심 투성이인 어린 아이가 온몸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듯 조 블랙도 자기 방식대로 이승을 겪어 나간다. 인간사에는 왜 이리 흥미로운 게 많은 건지. 어쩌다 한 숟갈 얻어먹은 피넛버터 맛은 왜이리 꿀맛이고, 나를 알아보는 저 여인에게는 왜 자꾸 끌리는 것이며,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양반은 뭐 때문에 회사에다 열정을 갈아넣고 있는 건지 아리송한데 짜릿해죽겠다.
사람 일도, 사자 일도 한치 앞을 모른다고 했던가. 조 블랙은 점점 초심을 잃어간다. 이제는 자신의 본분도 헷갈릴 지경이다. 수잔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위기에 처한 윌리엄의 회사를 자신도 모르게 도우며 이승에 미련이 남는 사태까지 이른다. 이와는 반대로 윌리엄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오히려 현명해진다. 신념을 밀어 붙여 회사를 끝까지 지켜내고, 가족과 밥을 더 자주 먹고, 자신의 생일 파티를 성심껏 준비하는 큰딸에게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한다. 자신에게 있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며 지금 순간을 잇는 힘껏 만끽한다. 유한한 시간 앞에서 조와 윌리엄의 삶은 묘하게 엇갈린다.
그리고 약속의 디데이. 윌리엄의 마지막 순간이 정해졌다. 바로 그의 65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 각자의 이별을 하느라 바쁜 날이기도 했다. 수잔을 너무 사랑해서 같이 저승으로 떠날 거라는 조의 말에 윌리엄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랐으면 좋겠다고 그를 회유한다. 진심은 닿았고 조는 자신의 어리석은 욕심을 내려놓는다. 수잔에게 이별을 고함으로써 참사랑을 깨닫게 된다. 인간 윌리엄도 다를 것 없었다.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삶에 후회 없다고 후련하게 외치는가 하면 조와의 이별로 상심이 큰 수잔을 위로하며 함께 춤을 추었다.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다 담아가려는 듯 두 눈으로 꾹꾹 눌러 담는 아버지의 바쁜 눈동자는 그 무엇보다도 강렬했다.
조는 재촉하지 않고 윌리엄을 기다려준다. 모든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그의 뺨을 타고 내려온 한줄기 눈물은 뒤늦게 깨달은 삶의 아름다움 내지는 벅참에 가까웠을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딸을 데려가지 않아줘서, 전에 없던 사랑의 의미를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때마침 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진다. 마지막 선물 같은 불꽃놀이를 각자의 가슴에 고이 간직한 채 둘은 길을 떠나기로 한다.
눈 앞에 보이는 다리 하나만 건너면 모종의 거래는 끝이 난다. 아직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 서있는 윌리엄이 물었다. “내가 겁내야 하나?” 그말에 미소를 띠며 조가 받아쳤다. “당신같은 남자에겐 아니죠” 담백한 태도로 죽음의 다리를 통과하며 둘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끝도 아니었다. 조가 남겨진 수잔을 위해 커피숍에서 만났던 원래의 청년을 다시 그녀에게 보내준 것. 영화는 그렇게 저무는 삶과 함께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알렸다. 어쩌면 나는 그 열린 결말에 묘하게 안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것은 무형의 얼굴을 하고
"보내기 힘들었지? 그게 인생이야..."
Meet Joe Black(1998), 윌리엄 패리쉬 대사 中
<조 블랙의 사랑>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이 새삼스러워지도록 만드는 영화다. 익숙해지면 마치 없는 듯 간과하게 되는 게 있다. 이를테면 오늘 먹은 따뜻한 밥, 식탁을 오가는 시시콜콜한 얘기, 일과를 마치고 난 후에 보게 되는 가족의 얼굴, 사랑을 가장한 잔소리, 걷기 좋은 날씨, 손에 쥔 치킨 같은 것들. 너무나 익숙해서 의식하지 않으면 자칫 ‘무형’의형태로, ‘무한’의 형태로 착각하게 되는 것들 말이다. 어디선가 조가 호통을 치는 것만 같다. “소중한 건 원래 말이 없어. 그걸 알아채도록 애쓰는 건 너의 몫이야!”하고.
뻔하게 여겼던 나의 치킨 생일 파티는 먼훗날 그리움으로 사무칠 순간임이 분명하다. 얼마 못갈 새삼스러움이란 걸 알지만 잠시나마 생각해 봤다. 어떻게 하면 내게 주어진 이 거대한 시간 덩어리를 정말로 잘 운용할 수 있을지. 사랑이 갓 스며들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조의 푸른 눈동자를 상기했다. 지난함과 눈부심의 경계에서 어디를 바라보고 갈 건지는 순전히 내 선택에 달렸다.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장면으로 무너져내리는 건 싫으니까. 좀 더 나은 것들로 덧대가며 삶을 굴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아름답다’보다 ‘이상하다’를 더 자주 느낀 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