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뭐라고 생각하나?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국어 선생님께서 던지신 질문이다. 기쁨? 슬픔? 동물도 그런 감정들은 느낄 수 있을 텐데. 머리를 굴려 보다 겨우 건져 올린 단어가 있었다.
후회요.
나의 대답이었다. 후회. 인간이 아닌 동물은 후회를 할까? 되어 본 적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간만큼 후회를 품고 사는 존재도 없을 것 같았다.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과거를, 미래를 생생하게 그리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현재만에 충실할 수 없는 우리는 종종 과거를 떠올리며 미소 짓고, 그러다 후회하고, 어떤 교훈을 얻는다. 그리고는 미래를 떠올리며 설레어하고, 이내 불안해하고, 마침내 지쳐 잠에 든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수많은 파편 속에 유독 날카롭게 남은 일부를 쥐고 후회라 일컫는다. 그날 선 조각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흠집을 내어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회라는 감정으로 인해 무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과 행동을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어른이라는 단어의 일부가 아닐까 추측한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흠집이 켜켜이 쌓여 다시금 새로운 나를 구성할 때, 더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나를 만들어 낼 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무얼 하면 좋을지. 무얼 해야 하는지.
깨진 유리 조각이 살에 닿을 때, 그리고 그 조각을 기어코 손에 쥘 때 상처가 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다행히도 인간의 몸이 그리 유약하지만은 않아 언젠가는 피가 멈추고 새 살이 돋기 마련이지만, 그 자리에는 흉터라는 흔적이 남는다.
그렇게 자리 잡은 불그스름한 흉터는 계속해서 우리의 눈에 담긴다. 맞다, 그랬지. 맞다, 아팠지 하며 지난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게 한다.
19살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을 '후회'로 떠올린 것은 그러한 망설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철저히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철저히 세밀해서 마치 지워지지 않을 흉터와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아니, 조금 다르다기보다 한 가지 차이점을 더 발견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인간이란, 우리라는 존재는 후회라는 감정 장치로 철저히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조각을 집어 들어 본다. 단지 전보다 조금 조심스레, 전보다 덜 아프게.
지금 나에게 누군가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다시 묻는다면, 나는 후회라는 단어를 꺼낼까 고민하다 결국 다른 표현을 선택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그렇게 해야만 함을 필연적으로 느끼는 존재라고.
흉터가 보임에도 다시금 손을 뻗을 수 있는 용기, 어쩌면 전혀 논리적일 수 없는 그 무모함이 인간만이 가진 신비한 감정이자 본능 아닐까? 물론 다른 많은 생명체도 때때로 그런 무모한 행동을 보일 것이다. 또한 내가 직접 그들이 되어보지 않았으니, 이런 나의 결론 또한 정답이라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존재보다 과거를, 그리고 미래를 머리와 마음에 생생히 담고 있는 인간이 행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조금 다를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조금은 더 위대하고, 조금은 더 아름다울 것이라 감히 적어내 본다.
혹여 지금 이 순간, 그 유일한 인간의 여정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손이 가진 흉터는 인간이기에 품게 된 선명한 역사이며 인간으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행위를 가능케 하는 유의미한 증거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래서 후회라는 상처가 눈에 들어올 때면, 그 위로 한 겹의 반창고를 한번 붙여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