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야기가 삶에 가져다준 것 - 화양극장 [도서/문학]

글 입력 2024.12.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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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좋은 단편을 소개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빛을 걷으면 빛.jpg

 

 

 

극장이라는 이상하고 근사한 공간


 

극장은 이상하고 근사한 공간이다. 오직 ‘이야기’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날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그곳에 모인다.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혹은 아주 이른 시간에 아주 먼 거리에서부터 출발하거나, 늦어서 허둥허둥 급하게 달려가거나), 시간이 되면 팝콘과 콜라를 한 아름 안고(혹은 생수만 들고서) 누군가와(혹은 혼자서) 티켓을 들고 극장에 들어간다. 그렇게 픽션에 입장한다.


극장에 입장하는 순간 현실은 차단된다. 거기서는 누구나 눈앞에 펼쳐질 이야기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정된 자리에 앉아야 한다. 상영 전에 나오는 광고는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보는 광고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가끔가다 광고 속 배우나 나레이션이 객석의 우리를 인지하고 멘트를 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그들이 앞으로 펼쳐질 영화를 안내할 친절한 가이드처럼 느껴져서.


조명이 꺼지면 이윽고 스크린에 영화가, 이야기가 상영된다. 우리는 거기에 흠뻑 빠져든다. 픽션에 녹아든다. 현실에 치여 진공처럼 쪼그라든 우리의 삶에 픽션의 숨이 깃든다. 우리는 기꺼이 몸을 맡긴다. 그리고 상영이 끝나 극장을 나설 때면, 픽션의 숨이 빠져나가고 현실의 빛이 흘러들 때면, 우리는 헛헛한 마음과 함께 강한 의혹에 휩싸인다. 내 삶도 저런 이야기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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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榮華)이자 도피처인 화양극장


 

성해나 소설가의 단편 <화양극장>은 ‘화양극장’이라는 낡은 단관극장에서 화재경보기가 울리면서 시작된다. 경보기가 울리는데도 ‘경’은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57*) 있다. ‘비극이 분명할 엔딩을 기다리며 숫자를 거꾸로’ 세기도 한다. 엔딩을 앞둔 그 비극은 마치 ‘임용 고사에 여덟 번 낙방한’ 경의 삶 같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소리쳐 부르고 데리고 나간다. 항상 텅 비어 있는 극장에서, ‘C열 오른쪽’에 앉아 영화를 보았던 할머니 ‘이목씨’다.


기계 오작동 땜에 화재경보기가 울린 걸로 밝혀진다. 극장 직원이 재상영 해주겠다며 기다려달라고 하고 사라지자 경은 그냥 집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돌리려 한다. 이목씨가 끝까지 보고 가라고 붙잡는데도 경은 이렇게 말한다.

 

 

결말까지 보고 싶지 않아서요.

왜요?

할머니가 물었다. 집요하네, 생각하며 그녀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슬픈 영화잖아요. 이런 영화는 안 봐도 결말 뻔해요.

경의 대답에 할머니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그렇지 않은데…… (59)

 

 

할머니는 경에게 결말을 이야기 해주고, ‘생각보다 밝’(60)은 결말을 알게 된 경은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마치 사주에서 좋은 말을 들은 것처럼.


‘화양극장’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고전 영화가 상영되었고, 영화광인 할머니는 그 때문에 자주 극장을 찾았다. 경은 할머니를 보며 생각한다. ‘어떻게 저렇게 몰입할 수 있을까.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도 아닌데.’(60)


반면 경은 왜 극장을 찾았을까? ‘팔 년간의 노량진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상주로 내려온’(61) 경, ‘정년퇴직하고 별다른 취미나 여가도 즐기지 않은 채 집에서만 생활’하는 아버지와 한집에 붙어사는 경은 아버지의 ‘경이 너 숨소리가 너무 크다’는 말과, ‘우려와 함께 은근한 멸시’(62)가 깃든 표정을 보고 괴로워한다. 그런 아버지, 아버지가 머무는 집에 있지 않으려고 동네를 배회하다 들른 곳이 화양극장이었다.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졸 때가 더 많았지만, 적어도 하루를 그냥 보냈다는 자괴감은 느끼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62)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jpg

 

 

극장은 누군가에겐 과거의 영화(榮華)가 펼쳐지는 공간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도피처였다. 영화에 관한 이목씨와 경의 입장도 다르다. 영화의 ‘너무 길고 무용’해 보이는 기나긴 러닝타임이 이목씨에겐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진다. 이목씨는 ‘자주 옛날을 그립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므로. 그 그리움이 ‘금요일마다 <애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같은 고전 영화를 상영해’(58)주는 화양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반면 경은 ‘전 나이들어도 지금이 그립지 않을 것 같아요. / 지금까지 내 인생은 거하게 말아먹은 영화 같거든요.’(65)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온통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과거의 그리움과 현실의 부정이 두 사람을 극장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나란히 앉아서


 

그렇게 둘이 떨어져 앉아 영화를 보던 어느 날, 시간 되면 한 편 더 볼 수 있겠냐는 이목씨의 제안에 따라 경은 영화를 한 편 보게 된다. 바로 이목씨가 스턴트 배우로 등장하는 ‘붉은 눈 흰 피’라는 액션 영화다.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보게 된다. ‘숨소리가 너무 크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다른 자리로 가려는 경에게 이목씨는 가지 말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히려 좋아요. 우리가 나란히 앉아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목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 중에는 타인과 같은 포인트에서 폭소하고 글썽이는 교류의 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여기기 때문도 있다고, 자신도 그렇다고, 그러니 여기서는 크게 숨을 쉬고 웃고 울어도 된다고. (67)

 

 

극장은 이야기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무수한 타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을 방해하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극장은 하나의 이야기를 같이 보며 같이 반응하는 공간이다. OTT가 성행하고 독립영화관이 밀려나고 멀티플렉스마저 점점 사라지는 시대의 흐름에도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극장을 찾는다. 극장이 현실을 차단하는 공간이자 픽션의 숨을 불어넣는 공간일뿐더러, 픽션을 보면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연결하는 공간인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목씨는 영화에 짧게 등장할 뿐이다. 경은 한 번도 유심히 보지 않았던 스턴트 장면을 유심히 보며 그 당시의 이목씨를 보게 된다. ‘액션 영화가 부흥하던 70년대’, ‘영화판엔 여자 감독도 여자 스태프도 희귀’(68)했던 시절에 이목씨는 영화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했다.

 

 

남들의 곱절은 고투했어요. 찢어지고 긁히고 부러지고, 핀잔 듣고…… 물에 빠져 기절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일어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이 뭔지 알아요? (…)

 

괜찮습니다, 였어요. 괜찮습니다. 한번 더 가요. (…)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도 그랬어요. 그 시절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내 표정은 거진 무표정이에요. 사사로운 감정은 숨겨야 마땅하다 여겼거든요. (68~69)

 

 

버스터 키튼 제너럴.jpg

 

 

당시 이목씨의 모습은, 이목씨와 경이 말을 섞게 된 후로 처음 같이 보았던 영화 <제너럴>에 등장하는 버스터 키튼, ‘‘내가 무표정이면 사람들이 더 많이 웃어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며 결코 웃지도 울지도 않던 키튼’(63), ‘대역 없이 위험한 스턴트 장면을 찍으면서도 무표정한 연기를 선보’여서 ‘스톤 페이스’가 별명이었던 키튼과 유사하다. 전에 <제너럴>을 보면서 이목씨가 ‘황홀한 얼굴’(60)이 되었던 것도, ‘웃는지 우는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목씨는 스크린에 등장하는 자신을 보며 말한다.


 

저 시기의 나는 참 위태로웠어요. 다시 저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결코 내 마음을 속이지 않을 거예요. 속 편히 웃고 울고 싸우고. 견디지 않을 거예요. (69)

 

 

그렇게 그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된다.

 

 

 

들어주며 달라지는


 

영화라는 낯선 세계에 진입한 경을 이목씨는 환대한다. 경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고 ‘경의 말이 다 맞는다는 듯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끄덕.’(70) 긍정한다. 그런 반응에 경의 태도도 달라진다. ‘이목씨 앞에서 경은 자조 섞인 말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숨기거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려 전전긍긍하지 않’(70)는다.

 

 

동경이야기 스틸컷.jpg

 

 

이목씨가 경의 의견을 긍정했듯 경도 ‘이목씨의 끄덕임을 긍정하며’ ‘더 유심히’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러자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그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카메라워크와 수많은 컷, 대사와 휴지 사이 감춰진 내밀한 서사, 원경과 근경에 따라 다르게 발생하는 낙차와 정념, 빛과 어둠을 오가며 직조되는 황홀경들이.’

 

 

 

영화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


 

서로 다른 열에 앉아서 영화(픽션)를 보았던 두 사람, 현실에 대한 부정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극장에 찾아갔던 두 사람은 같은 줄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를, ‘픽션’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픽션이 타인을 경유하며 풍부해지는 순간이다. 삶이 타인을 경유하며 풍부해지듯이. 그 풍부함에는 상대방을 간섭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호의이자 예의가 깔려있다.


하지만 픽션은 현실에 침범당하기 쉽다. 극장이 픽션을 현실로부터 차단해 주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극장 자체가 현실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극장은 현실 차단의 공간이 아니라, 차단하고 있다는 ‘가장’의 공간이다. 픽션은 그 가장 속에서 유지되는 일종의 ‘틈’이다. 그 틈을 현실이 침범해 메꾸는 순간, 픽션의 숨이 깃들며 풍부해지던 삶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빈약해진다. 어느 날 언니한테서 전화가 와 중간에 영화관을 나온 경. 단번에 임용에 성공한 언니에게 자신은 임용을 포기했다고 전하자, 언니는 마치 아버지를 똑 닮은 듯한 말을 한다.


 

너도 남들만큼은 살아야지. (72)

 

 

그 말에 경은 자신이 ‘결국 아무 말도 못할 거라는 것을, 또 누군가를 염오하게 될 것을, 그리고 그건 언니나 아버지가 아닌, 뭐 하나 제 의지대로 못하는 자신이리라는 것을’(72) 깨닫는다. 오늘은 영화 이야기를 못 나눌 것 같다고 거절하는 경을 이목씨가 걱정하자, 경은 전과는 다르게 이목씨에게 날이 선 말을 쏟는다. ‘우리가 속 얘기까지 터놓을 만큼 막역한 사이는 아니잖아요.’(73)


그렇다. 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나 ‘픽션’이었다. ‘픽션’에 관해서만 각자의 삶을 밝힐 수가 있었다. 언니의 전화를 받은 경을 휩싼 자괴감은 아마 픽션과 현실의 괴리감과 같은 것일 테다. 픽션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극장에서 급작스레 전화가 걸려 오는 것처럼 픽션 속으로 밀려드는 ‘현실’ 간의 괴리감. 쉽사리 풀리지 않는 현실에 대해 가졌던 의문,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야 하는 의문은 결국 자신에게 수렴해 괴리감을 빚어내고, 그 괴리감은 자신이 약하고 비겁하며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까지 믿게 만든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하고 비겁할까. 왜 나는 남도 나도 사랑하지 못할까. 스스로를 책망하며 그녀는 열, 아홉, 여덟…… 숫자를 거꾸로 셌다. (73)
 

 

경이 위기에 다다를 때마다 되뇌었던 카운트다운은 마치 삶의 종지부를 암시하는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면도 있다. 경은 그렇게 숫자를 거꾸로 세면서 삶의 엔딩을 ‘스스로’ 부여하고 싶어 했다. 그 말인즉슨, 경은 타인에 의해, 외부의 개입에 의해 삶이 한순간에 박탈당하기보다도 카운트다운을 되뇌는 식, 스스로 삶을 내려놓는 식으로라도 삶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주인’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삶의 진짜 주인이 된다면 경은 그 카운트다운을 거꾸로, 숫자를 바르게 세게 될지도 모른다. 바르게 세는 숫자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계속 경의 삶을 지휘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빠져 있던 것


 

이렇게 경이 자괴감에 휩싸여 있을 때, 화재경보기가 울렸던 그날처럼 이목씨가 또다시 경에게 다가간다. 국물을 먹으러 가자는 이목씨의 뜬금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은 역 근처의 복집에 방문한다.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두 사람. 픽션의 자리가 아닌 삶의 자리에서 마주한 두 사람. 경은 그때서야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고백하기 시작한다. 극장에 상영되는 픽션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 자신이 온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살아온 이야기를.


각자의 관점에서 픽션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들은 픽션에서 벗어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삶이라는 괴로움에 대해. 경의 괴로움도 괴로움이지만, 여태까지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이목씨의 괴로움은 좀 더 질기고 오래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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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씨의 괴로움은 이목씨가 고양이 ‘뤼미에르’(빛이라는 뜻)를 보여준다며 경을 집으로 초대하면서 밝혀진다. ‘이사를 참 많이 다녔’(76)던 이목씨, 이곳이 ‘마지막 정착지’였으면 한다는 속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이목씨의 괴로움은 경이 ‘거실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액자들을 구경’(77)하다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얼굴이 둥글고 쌍꺼풀이 짙은 한 할머니’(77), ‘연수씨’를 보게 되면서 명료해진다.

 

 

그 시대에는 그랬어요. 그때 우리는 우리를 뭐라고 지칭해야 하는지도 몰랐거든요. 그저 부모가 바라는 대로 시대가 살라는 대로 살았던 거죠. (78)


경이 겪어온 세계에서 동성 간의 사랑이란 그랬다. <패왕별희>는 가슴 아팠고 <캐롤>은 아름다웠으며 <모리스>는 근사했지만, 엔딩 크레디드가 다 올라가면 사랑이 아닌 ‘러브’가 되고, ‘그거’가 되고 마는. (79)

 

 

동성 간의 사랑은 픽션에서는 근사했지만, 현실에서는 냉혹하게 다뤄졌다. 그건 마치 형식은 다정하지만 그 내용은 마음을 좀먹게 하는 경의 아버지, 언니의 사랑과 같다.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경의 마음, 그리고 연수씨와 사랑하며 살고 싶었던 이목씨의 마음은 그렇게 외부로부터 낙인찍히고 부정당했다. 그러한 공통의 괴로움이 발견된다. 하지만 경은 이목씨의 그 고백이 아직 얼떨떨하다. 연수씨가 동지에 입국한다며 그때 새알심 넣은 팥죽을 같이 먹자고 이목씨가 제안하지만 경은 흔쾌히 좋다고 말하지 못한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


 

경은 이목씨의 삶과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짐작해보려 애’쓴다. ‘이목씨가 기꺼이 그래주었듯, 자신도 그의 편이 되고 싶’(79)어서. 영화에 대한 의견을 그토록 열심히 들어주고, 삶에 대한 괴로움도 묵묵히 들어주었던 이목씨를 경도 이해하고 싶어 한다. 픽션에 관해서만 의견을 공유하던 그들이 진정한 삶의 공유로, 타인의 이해로 나아가려는 순간이다. 그토록 스스로를 미워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채 숨어들려 했던 경의 이러한 변화는 이목씨의 내밀한 고백에서 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도 현실이 삶을 침범하지만, 언니가 경에게 했던 말의 여파와는 다른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언니는 경에게 ‘단정’했고, 이목씨는 경에게 ‘고백’했다. 단정은 스스로를 미워하게 했지만, 고백은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했다. 다르게 고쳐 말해야 한다. 현실이 삶에 ‘스며든’ 것이다.


그날 이목씨가 고백했던 괴로움은 그날로부터 시간이 지나고 이목씨가 다시 극장에 나타났던 동짓날에 상영된 영화, <동경의 황혼>과 닮아있다. 이목씨는 <동경의 황혼>을 만든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를 볼 때는 마음이 쓰여요. 이 사람의 밝음 뒤에는 이런 그늘도 있구나, 겨울이 이토록 쓸쓸한 계절이었구나, 싶어서요.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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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씨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던 경은 이목씨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물어보지 않고 기다린다. 그렇게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까지 오지만, 차에서 내린 한 여자를 보게 된 이목씨가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말한다. 돌아가는 길에 춥겠다며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주면서.

 

 
이목씨의 표정이 내심 눈에 밟혔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이목씨의 곁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경은 그럴 수 없었다. 그게 다 참견이고 불필요한 관여인 것 같아서. 무엇보다 자신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지 경은 알 수 없었다. (82)
 


결국 이목씨의 말을 듣지 못했다. 기다리다가 놓치고 말았다.

 

 

 

이야기를 빌려 삶을 말하는 용기


 

겨우내 경은 다시 임용을 준비하던 삶, ‘이목씨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83)려고 분투한다. 아버지가 원래 그랬던 대로 경을 돕는다. 그녀는 아버지가 거북하게 여길 정도로 매진한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동네에 사는 ‘바지씨’, 동성연애자를 흉보는 말을 하면서 ‘너는 얼마나 다행이냐. 너한테는 내가 있으니.’(85)라고 말한다.


 

아버지.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경은 말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월권이에요.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예요. 아버지가 하는 말들이…… 제 영혼을 갈기갈기 찢고 있으니까요.

 

 

경이 어떻게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용기를 내어 자신이 괴롭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날 경이 한 말의 일부는 이목씨와 함께 본 어느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점차 굳어가고 뒤틀리는 것을 지켜보며, 차오르는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경은 영화에서 본 대사들을 짜깁기해 더듬더듬 뱉었다. 초연을 올리는 배우처럼 서툴지만, 담대하게. 비록 지금은 영화 속 대사를 차용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대사만으로 충분할 날도 올 거라 여기며. (85)
 

 

삶(혹은 삶의 관점)을 빌려 픽션을 이야기하던 경이, 여기선 반대로 픽션을 빌려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거짓이 아닌 삶,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삶, 그러나 픽션처럼 남들에 의해 그토록 쉽게 부정당하는 삶에 대해, 픽션의 대사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다. 픽션이 경에게 용기와 대사를 준 것이다. 픽션이 삶을 도운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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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 금요일에 다시 극장으로 간 경은 버스터 키튼 주연의 영화를 보게 된다. 이목씨는 평소 앉던 자리에 있었다. 버스터 키튼이 말년에 찍은 그 영화에서는 스톤 페이스던 키튼이 ‘전에 없이 다채로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마음껏 일그러뜨렸고, 박수를 쳤고, 또 웃었다.’(86~87) ‘그다지 슬픈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장면에도 이목씨는 운다. 그건 표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며 살아왔던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 회한, 후회인 것 같다. 끝없이 과거로 빠져드는 이목씨를 보며 경은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런 이목씨 뒤에서 경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가 이곳에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천천히. (87)
 

 

‘그들이 그렇게 함께 같은 장면을 바라보는 동안, 영화 속 키튼은 길을 걸어 남쪽으로, 더 밝은 쪽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더 밝은 쪽’은 영화가 끝나고 그들이 극장을 빠져나가면 보게될 빛이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 같다. 항상 무언가를 침범하기만 하던 현실이, 그 성질이 달라진 것일까. 무엇이 현실을 빛으로 가득하게 만든 것일까.


영화가 끝나고 나오자 이목씨는 경에게 묻는다.


 
경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88)
 

 

경이 대답하지 못하자, 이목씨는 자신이 스턴트를 하다 크게 다친 일을 말해준다. 입원해 있던 동안 시대가 바뀌면서 스턴트 배우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병문안을 온 형제들은 이목씨를 달갑지 않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도 이젠 남들처럼 살면 안 되냐?’(89)


‘시간이 지나도 스러지지 않는 사고의 잔상보다 이목씨를 괴롭게 한 건 그런 말들이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는 이들이 쉽게 던지는 가혹한 말들.’(90) 이목씨도 경과 똑같은 말에 괴로워했다. 그 말은 태어날 때부터 쭉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가족들이 한 말이었다. 가족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월권’했고,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경과 이목씨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사랑을 주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이목씨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90)고 말한다.


그러다 ‘얼굴 실밥을 풀던 날’(90), 산책하며 빛을 보게 된 날, ‘얼굴이 둥글고 흰 학생’(91)이 찾아온다. 그 학생은 자신이 불청객이 아니고 방문객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저기, 나는요, <붉은 눈 흰 피>의 오프닝을 열 번이나 봤어요. 같은 영화를 열 번이나 보니까 보이더라고요. 주인공 뒤에서 구르고 끌려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요. (…)

 

그냥…… 나 같은 사람도 있다구요. (91)

 

 

바로 그때가 이목씨가 끝없이 침전하는 삶의 어둠 속에서 빛을 본 순간이었다. 가족이 사랑과 관심이라는 포장으로 감싼 ‘상처’를 개의치 않고 건넬 때, 타인이, 나랑은 일절 상관도 없는 타인은 어떤 포장으로도 감싸지 않은 ‘빛’을 건네주었다.


 

이목씨는 말했다. 어둠을 걷으면 또다른 어둠이 있을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어둠을 걷으면 그 안에는 빛이 분명 있다고.

 

나는 이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요.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92)

 


이젠 경이 대답할 차례다.

 

 

 

뻔하지 않은 삶을 주고 간 사람


 

그러나 경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고, 그 상태로 칠 년이 지나버렸다. 그날 이후 화양극장은 조용히 폐관되었고 경은 상주에 넉 달 더 머물다가 서울로 떠나 살았다. 이목씨와 자연스레 헤어지고서. 팔 년 동안 임용 고사에 매진하느라 ‘취미 하나 없고, 어디에도 마음 두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65)던 경은 그로부터 칠 년 후 ‘교직과 관련 없는 직업’(92)을 가진 사람, 영화 감상을 ‘블로그나 왓차피디아에 틈틈이 올’리며, ‘자기 취향을 알아가고 생활을 정성껏 돌보는 사람’, ‘여유와 만족’을 ‘체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이게 사람 구실 하며 사는 걸까’(93) 고민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지.’라며 넘기는 사람이 되었다.

 

 

어둠 속의 댄서.jpg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어서야 우연히 <어둠 속의 댄서>를 다시 보게 되었다. 화재경보기가 울리던 날에 보고 있었던 영화. 이목씨가 말해주어 결말을 알고 있는 그 영화. ‘예상했던 것보다 밟은 결말’(93)이었던 그 영화. 경은 그 영화를 보며 흐려져 가는 기억 속에서 이목씨와 연수씨를 상상한다. 그 상상이 마치 경이 이목씨에게 건네고 싶었으나 건네지 못한 질문들, 답하고 싶었으나 답하지 못한 대답, 보여주고 싶었으나 보여주지 못한 ‘빛’인 것처럼. ‘하지만 결말은 이목씨가 들려줬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94) ‘비극적이고 참담’했던 것이다.

 

 

엔딩 크레디드가 올라가자 객석에 앉아 있던 이들이 하나둘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관객들이 전부 떠나고 페이드아웃되는 화면을 바라보며 경은 이목씨의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어때요? 그렇게 뻔하진 않죠?

밝은 결말을 이야기해주던 그녀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미소, 끄덕임을. (95)

 

 

픽션이 삶을 돕듯,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도왔다. 그것도 실제와 완전히 다른 밝은 결말을 통해서. 이목씨가 경에게 주고 싶었던 픽션, 삶은 그런 거였다.

 

 

경은 천천히 상영관을 나섰다. 문을 열자 빛이 쏟아졌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발갛게 부은 눈가를 비비며 경은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바로 셌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슬픔을 받아들이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95)

 

 

경은 숫자를 바로 세며 자신의 ‘엔딩’이 아닌 이목씨의 ‘슬픔’을 받아들인다. 그토록 고맙고 미안한 슬픔에 대해서. 슬픔은 빠져나가지 않고 차오른다. 넘쳐흘러 멀리멀리 퍼져갈 듯이. 언젠간 이목씨에게 닿을 듯 멀리.

 

 

 

이야기를 복습하며


 

이 따뜻하면서도 먹먹한 소설을 읽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동짓날을 10일 앞둔 한겨울이 되었다. <화양연화>가 떠오르는 제목도 제목이지만, 영화와 극장을 소재로 한 근사한 이야기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낭독극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냉큼 예매하고 보고 왔다.

 

 

화양극장 포스터.jpg

 

 

활자로만 존재하던 인물들이 무대에서 성우들(방시우, 김보나, 박요한)의 좋은 목소리로 살아나서 이야기 또한 새롭게 다가왔다. 낭독극으로 이 이야기를 복습하면서 삶이 픽션을 통해 위로받는 사실에 더해, 어떤 삶은 누군가 쓰고 있던 픽션처럼 덧대지기도 수정되기도 하면서 풍부해지고, 그럼으로써 그 삶을 사는 사람을 위로한다는 걸 깨달았다. 픽션이 삶을, 삶이 사람을 위로하는 아름다운 매커니즘을 터득할 수 있었다.


어떤 픽션은 ‘희망’이나 ‘소망’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한 허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삶이 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목씨는 경이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의 결말을 경에게 아직 오지 않은 삶의 결말에 빗대어 생각하고 일부러 밝게 말해주었다. 픽션이 삶에 비유되어 사려깊게 다뤄졌고, 그 픽션은 결국 삶이 되었다. 그러니까 결국 희망이나 소망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유법처럼 빗대어 생각할수록 그 희망과 소망은 삶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낭독극이 끝나고서는 원작자인 성해나 소설가와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경과 이목씨가 내내 고집하던 좌석에 관한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성해나 소설가는 경의 고정석인 D열의 왼쪽이 비상구에 가까운 자리라고 말했다. 소설의 시작 부분, 화재경보기가 울린 그 장면에서 보자면, 경은 쉽게 극장을 탈출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된다. 경의 좌절이 얼마나 깊었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던 답변이었다. 그에 더해 나는 삶의 엔딩을 보려고 했던 경을 구출한 사람, 경보다 비상구에서 멂에도 불구하고 혼자 빠져나가려 하지 않고 경을 돌아보고 붙잡은 이목씨의 사려깊음이 경의 좌절보다 더 깊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결국 이야기를 나누고 삶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라고. 경에게 좋은 삶을 선물을 해준 이목씨도 경을 통해 자신의 괴로움을 위로받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진짜 ‘화양극장’을 나섰다.

 

 

* 이하 괄호는 쪽수 표기

 

 

 

에디터 안태준.jpg

 

 

[안태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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