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낡지 않는 아름다움 -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

글 입력 2024.03.2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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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즐겨 들은 대중가요를 떠올리면 그 시절 유행하던 휴대폰이나 광고처럼 다양한 기억들이 약간 바랜 필름처럼 감겨 딸려오는가 하면, 클래식은 꼭 시간의 압력을 언제나 덜 받는 것처럼 쭉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듯 하다. 몇 백 년이라는 역사의 겹을 떠올리면 잘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낡지 않고 늙지 않는 힘이 있다.

 

클래식 작곡가의 이름은 생소하고, 작품의 번호가 표시되어 있는 제목은 더 생소하지만, 통화 연결음으로 익숙한 비발디의 ‘사계’, 학창시절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던 종소리나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더 강하게 남아있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처럼 클래식은 항상 가까운 생활과 문화 속에 살아 숨쉬어 왔다.

 

 

[통합 포스터]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jpg

 

 

공연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는 클래식을 가장 클래식 답게 표현하고 살린 공연이었다.

 

1부는 쇼팽 음악 속에 숨은 지브리 음악으로, 2부는 지브리 음악 속 숨어있는 쇼팽 찾기로 구성되었던 이번 공연은 아는 맛과 모르는 맛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면서도 훌륭한 조화였다. 지브리의 친숙한 멜로디는 영화 각각의 영상과 이미지, 이야기까지도 다양하게 끌어오면서 감상의 지평을 넓혔고, 쇼팽의 왈츠와 낭만적인 선율이 입혀진 색을 느끼면서는 응용되고 섞인 것의 신선한 감각이 호기심과 반짝이는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또 클래식 이즈 더 베스트, 라는 유명한 말은 흰 티에 청바지라는 패션 아이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입을 열지 않고는 못배길 신나는 공연과 페스티벌들의 전자음을 입힌 크고 거친 소리들은 스피커를 뚫고 나오듯 강렬한 자극으로 주의를 사로잡았다면, 클래식 공연의 악기들은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롭고 정교한 힘으로 공연장의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연주가 시작되면 악기 외의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공연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불순물이 모두 걸러지고 얼음을 띄운 찬 물이 불쑥 끼얹어지는 것처럼 생각과 감정이 청신해지는 감각이 있었다. 로파이 음악에는 시끄러운 마음이 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편안함이 있다면, 반대로 클래식 음악에는 잠시나마 투명하고 예리한 감각으로 정신을 가다듬게 하는 정갈함이 있다. 피아노는 청아하고, 바이올린은 부드럽지만 칼처럼 쭈뼛 정신을 서게 하는 날선 아름다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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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초반 마녀 배달부 키키의 ‘바다가 보이는 마을’의 연주를 들으며 이 공연이 꼭 혼자 떠나온 안전한 여행 같다고 생각했다. 몇 안 되는 악기들이 각자의 고유한 소리로써 안정감 있는 하모니를 만들면, 나는 그 길을 즐겁게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꼭 연주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클래식을 들을 땐 낯 익은 구간이 지나면 살짝 넋이 빠지는 구간이 생기는 게 좋다. 틈이 생기는 여유가 좋다.

 

이 여행길에서 나는 내가 더 이상 클래식이 따분하다고 느끼지 않을 거라는 점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이 공연에서 연주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쇼팽의 음악은 ‘녹턴 Op. 9의 No. 2’. 실제로 널리 알려진 곡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 곡에 갖고 있는 편안한 느낌은 나만의 고유한 기억에서 오는 듯 하다.  트라이앵글이나 캐스터네츠 다음으로 처음으로 악기를 다룬 것이었을 짧은 어린 날 연주하던 악보들이나 피아노 소리를 떠올리면 기억이 여기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 속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건 성실하고 섬세하고 또 정교한 감각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피아노는 혼자 연주하는 것. 악보를 스스로 읽으면서, 읽는다는 건 눈으로 문자나 기호를 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점점 느리게 연주한다는 말에 적합하고 듣기 좋은 템포를 찾는 건 나의 몫, 또 생각한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 사이의 괴리를 느끼면서, 그저 10개의 동그라미를 다 채우기 위해서일지라도 연습하는 나. 손가락이 짧아 한 옥타브 위의 음이 눌러지지 않거나 트릴이 안 돼서 고전하는 나. 그럼에도 연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정직해질 수밖에 없던 시간. ‘연습’의 개념을 습득한 건 악기 연주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곡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제목들 사이에서 몇 없이 기억하는 곡, 연주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느꼈던 곡. 피아노는 내게는 성실함과 정직함의 가치를 배운 경험 중 하나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흐른다고 빛바래는 경험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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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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