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감각적이고 분명한 상징 -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2) [공연]

추상적 요소를 무대에 형상화하기
글 입력 2024.03.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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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에는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리뷰는 3부로 이루어진 리뷰 중 2부로, 추후 3부와 이어집니다.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동명의 원작 희곡을 직관적이면서 입체적으로 각색하고 있다. 이러한 각색의 방향과 의미가 잘 파악될 수 있었던 까닭은 작품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기본적 요소인 ‘음악’과, 무대 위에 등장하는 기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기에 앞서, 이 글은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리뷰 1편과 이어진다. 작품의 전반적인 소개와 내용적 측면에서 원작 희곡의 각색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싶다면, 먼저 리뷰 1편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리뷰 1부 보러 가기

 

필자의 불찰로 예상보다 글이 많이 길어지게 되어, 본 리뷰에서는 음악, 무대장치, 의상, 조명 등 공연에 등장하는 수많은 연극적 기호들을 그 맥락과 함께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무대에서 인물들의 삶이 극장 밖 관객들의 삶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극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전략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서술하겠다. 다음 편은 정말로 마지막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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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사용: 조화와 저항의 감각적 표현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음악이다. 특히나 시각이 차단된 인물들의 세상을 구현해 내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화된 감각적 자극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이 점에서 음악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극의 첫 부분과 1막 중반부에, 암전이 된 무대 위로 학생들의 아카펠라가 흘러나오며 그에 맞춰 조명이 하나하나 켜지면서 무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연출이 삽입된다. 이는 학생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 중 하나인 ‘청각’과 무대를 바라보는 정안인 관객의 ‘시각’을 대응시킴으로써 인물들이 인지하는 세상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시도이다. 이와 연관되어 뮤지컬 넘버들은 학생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 또는 자신과 관계 맺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며 관객들이 그것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한다.

 

극 초반에 학생들이 부르는 넘버들은 조화로운 화음들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멜로디로 진행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학생들이 느끼기에 그들이 살아가는 학교 안의 세상은, 개개인이 화음에서 어긋나지 않기 위한 ‘규칙’을 잘 따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학생들의 이러한 견고한 평화를 나타내는 곡 ‘M-02. 우릴 위한 세상’의 화음은 학생들이 학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그나시오를 향해 화합이 아닌 싸움의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M-09. 싸워야 해’에서 어두운 톤으로 변주된다. 이는 학생들을 포용하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듯했던 엄격한 통제와 규칙이 사실은 배제와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모순을 의미적으로 드러낸다. 음악을 통한 관객의 감각적 인식이 극을 풍부하게 파악하기 위한 의미적 영역으로도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누리던 평화를 뚫고, 학교 체제에 반항하는 인물인 이그나시오가 등장한다. 이그나시오의 첫 솔로 넘버 ‘M-05. 모두 장님이니까’는 저항을 상징하는 강렬한 록 음악의 성격을 띤다. 이는 학생들 사이에 이그나시오의 등장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굳건히 믿어왔던 학교 체제에 대한 이그나시오의 반론에 학생들이 흔들리며 혼란을 겪을수록 넘버에는 멜로디와 음절 수가 맞지 않아 박자가 어긋나는 가사들이 자주 배치된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학생들이 느끼는 불안한 분위기에 감각적으로 공감하게끔 한다.

 

극의 특성 상, 인물들의 의견 대립은 각자의 촘촘한 논리 싸움으로, 관객의 몰입도를 유지하고 분명한 이해를 돕는 별다른 장치가 없다면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수 있다. 이때 도움을 주는 요소 역시 음악이다. 극은 ‘M-17. 빛, 볼 수 있다면’에서 빛을 향한 열망을 표현하던 이그나시오의 멜로디를 마지막 넘버인 ‘M-22.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에서는 까를로스가 부르게 한다. 그 반복의 구조로 도달하는 과정 중, 까를로스가 부르는 넘버에는 이그나시오의 특징이 되던 록 음악이 가미되고, 이그나시오의 넘버에는 학교 학생들이 추구하던 부드럽고 안정적인 음악이 가미된다. 그리고 엔딩 직전의 곡인 ‘M-21.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는 직접적으로 다른 선율을 부르던 두 인물의 멜로디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보인다. 까를로그와 이그나시오, 두 인물이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가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유리된 공동체를 위한 더 나은 삶’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이 극의 진행 내내 그렇게 은연중에 드러난다. 결국 까를로스가 이그나시오와의 대립 끝에 몰랐던, 또는 모르는 척 했던 자신 안의 빛에 대한 열망을 깨닫고, 이그나시오와 같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극의 구조는 ‘어느 장면에서 어떤 인물이 특정 멜로디를 부르는가’라는 요소를 통해 명확해진다. 또한 음악의 선율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인물들의 논쟁과 각자의 주장을 자연스레 정서적인 영역으로도 확대시킨다.

 

뿐만이 아니라, 1막에서 이그나시오가 학교를 떠나려 할 때 후아나는 ‘교내에서 더 지배적인, 강한 힘을 가진 입장’이자 ‘포용의 주체’로서 이그나시오가 가지 않도록 설득하는 노래를 부른다.(M-07. 안녕) 그리고 같은 멜로디를 2막 ‘M-16. 키스’에서 이그나시오가 부른다. 이 장면의 경우 이그나시오의 주장이 학교 학생들에게 너무 큰 영향을 미치고 학교 체제가 위협받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후아나가 이그나시오에게 학교를 떠나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앞서 곡의 멜로디를 주도함으로서 권력을 나타내던 후아나의 파트를 부르는 이그나시오는 후아나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라 말하며 설득한다. 이 장면에서 학교 내의 지배적인 입장이 전복되었으며 이제는 이그나시오가 권력을 가진 ‘포용의 주체’가 되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또한 도냐 페피따가 까를로스와 학생들을 향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는, 학생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의 진실들을 자신은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논리를 직접적으로 담은 도냐 페피따의 가사 ‘내가 보는 건 너흰 보지 못하는 것’(M-18. 이야기)에 해당하는 멜로디를 이그나시오의 죽음 이후에는 까를로스가 부른다.(M-20.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진실) 결국 도냐 페피따 역시 학교의 안전과 자신의 지위를 위해 이그나시오의 죽음에 관련된 진실을 함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진실을 쥐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는 도냐 페피따 외에 이그나시오의 죽음의 정황을 아는 유일한 사람, 까를로스로 뒤바뀌는 것이다.

 

작품은 가사가 들어가지 않은 연주곡 역시도 의미적으로 촘촘하게 사용하고 있다. 주목할만한 음악은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다. 이는 극이 시작되기 전과 후에 흘러나오며 학교의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이는 오프닝 곡에서 극을 여는 학생들의 아카펠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또 학교 수업 종소리로 변주되며 학교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극 중에서 도냐 페피따가 페르귄트 모음집의 바탕이 된 입센의 ‘페르귄트’의 내용을 비유로 사용하며 이그나시오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허황된 꿈을 꾸지 말라’는 요지의 교훈을 전한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본래 가사가 있는 곡으로, 솔베이지는 페르귄트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가 허황된 꿈으로 방랑하고 있을 때에도 한 자리에서 계속해서 그를 기다린 인물이다. 방랑 끝에 다시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집으로 돌아온 페르귄트는 솔베이지의 사랑을 깨닫지만 그녀의 품에서 바로 죽음을 맞는다. 원곡의 가사는 솔베이지가 페르귄트의 죽음 이후에도 그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담는다. 또한 이 노래를 부른 후 솔베이지는 페르귄트를 따라 죽음을 택한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내내 들리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학생들을 향한 ‘사랑’이라 믿으며 학생들을 억압하는 도냐 페피따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무리 자신에게 허락된 것 이상을 꿈꾸더라도 다시 늙고 지친 채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나는 그러기를 끝까지 기다릴 것이다’ 라는 요지의.

 

하지만 동시에, 이 곡은 까를로스의 입장과 연결되기도 한다. 까를로스 또한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을지라도 빛에 대한 희망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그나시오를 만나며 결국 그 사실을 깨달았으나, 그 순간 이그나시오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까를로스의 선택에 대한 가능성과 그 의미가 극이 진행되고 있는 내내 음악을 통해 암시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까를로스, 그리고 관객들은 극의 마지막에 모든 전개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러한 ‘암시’가 늘 존재해왔음을 알 기회를 가진다. 늘 존재했지만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자신들의 소망과 학교의 허위를 나중에서야 비로소 깨달을 기회를 가지게 된 학교의 학생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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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공연사진 ⓒ뉴프로덕션

 

 

 

교복과 위계


 

직사각형의 단과 계단들로 구성된 무대는 인물이 서 있는 위치에 높이차를 부여한다. 이는 인물들 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와, 특정 순간 몇몇 인물이나 학교 전체가 누구의 주장에 압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용이하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뮤지컬은 원작에서 사용되던 상징인 ‘교복’을 더 촘촘하게 활용한다. 교복은 학생들이 특정 학교의 구성원으로 속해있다는 소속의 의미이자, 소속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의 일부로, 소속의 안정감과 통제를 동시에 상징하는 것이다. 도냐 페피따의 규율 아래 생활하는 학생들은 교복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단정함을 완벽하게 유지한 채로 무대를 활보한다. 특정 학생들이 도냐 페피따를 마주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모습은 학생들과 도냐 페피따 사이의 통제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그 사이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채, 자켓 단추도 잠그지 않고 어딘가 단정치 못한 교복 차림으로 등장한 이그나시오는 그 등장부터 ‘저항’과 ‘통제의 균열’이라는 강렬한 상징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그나시오의 주장에 혼란을 겪고 그에게 동화될수록 학생들은 교복의 단추를 풀거나 그 중 일부를 벗는 모습을 보이고, 이그나시오의 죽음 이후 도냐 페피따가 더 강력하게 지배권을 잡을 때, 학생들은 다시 교복 단추를 채우고 선글라스를 끼며 단정한 모습을 찾아간다. 교복은 인물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순응에서 갈망으로, 갈망에서 순응에로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자, 학교라는 배경을 탄탄하게 구현하는 소재로, 관객들이 극에 몰입하면서도 극의 흐름을 더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이러한 인물이 서 있는 위치의 높낮이와 교복의 상징성은 극은 결말부에 강렬하게 반전되며 관객에게 극이 끝나고도 잊지 못할 질문을 남긴다. 극의 마지막 부분, 여지껏 이그나시오에 대항하는, 열렬한 교칙의 수호자였던 까를로스는 처음으로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친다. 반면에 그의 환상 속에 등장하는 이그나시오를 포함한 나머지 학생들은 교복을 단정히 입은 채이다. 또한 까를로스는 무대 바닥에서 괴로움과 회의를 느끼고 있는 반면, 이그나시오는 무대 뒤편 계단 위에 서서 카를로스와 학생들을 내려다본다. 이는 바로 앞부분까지 유지하던 이그나시오와 까를로스의 위치를 명백히 뒤집는다. 학교 안의 세상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까를로스는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즉 그 세상의 원리와 규칙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고 따르던 인물로, 그로 인해 학교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우등생이다. 하지만 학교 밖으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까를로스는 커다란 세상에서 스스로 유리된 채 세상이 돌아가는 명확한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 인물이다. 근본적인 세상의 이치와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물은 그 자신이라는 것을, 까를로스는 극의 마지막에 깨달은 것이다. 모두가 다시 이그나시오의 죽음 이전으로 돌아간 속에서, 학생들의 리더였던 까를로스의 내면에서 극적으로 전복된 가치는 다시 공연이 시작되기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관객들에게 그들의 삶에 있어서의 안주와 변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직선의 조명과 통제


 

뮤지컬의 조명으로 강조되는 것은 ‘직선’이다. 무대의 테두리와 무대 위 단의 모서리들에 조명으로 둘러지는 직선은 자연스레 무대 안쪽으로 인물들을 가두어 놓는 경계선과 같은 이미지가 된다. 이러한 경계선은 방학동안 겪은 일들을 회상하던 까를로스가 학교 바깥세상에서 한계와 소외를 느낀 상황을 이야기할 때, 즉 시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불공정한 세상에서 자신이 유리됨을 이야기할 때 그어진다. 동시에 학생들 스스로가 학교 바깥과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자 ‘학교 외부인’에 가까운 이그나시오의 주장을 거부한 채, ‘여긴 오직 우리만의 세상’이라 말하며 외부와 자신들의 분리를 자처함으로써 학교 내부의 체계를 유지하고자 할 때 그어지기도 한다. 이는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요소로 인한 분리와 소외를 학생들 스스로가 사회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있는 모습과 연결 짓는다. 학생들의 자의와는 달리 불공정한 사회로 인해 다수의 권력자들로부터 분리된 학생들의 세계가 구축되었지만, 학생들이 계속해서 강력하게 분리를 자처하는 모습이 외부와의 경계를 더 견고히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학생들이 이그나시오에 의해 익숙했던 학교의 풍경을 낯설게 느끼고 서로의 관계에서 혼란에 빠질 때(M-08. 알 수 없어), 학생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무대 바닥에 직선들이 서로 분절되고 겹쳐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조명이 사용됨으로써 그들의 관계를 돈독하게 지켜주고 외부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었던 경계가 위협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직선 조명 역시 학생들의 안정감의 소실과 영역 밖으로의 사고 확장이라는 내면의 변화를 가시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직선 조명을 사용한 물리적, 심리적 경계의 표현은 이러한 경계가 교내에서 누구로부터 관리되는지를 알려주는 데로 확장된다. 극 시작 전, 무대 위 줄지어 놓인 의자 위를 창살처럼 비추던 창틀 조명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극에서는 ‘의자’를 개개인의 학교에서의, 또는 사회에서의 입지를 뜻하는 ‘자리’와 연관 지어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대표적으로 까를로스의 솔로곡인 M-15 ‘내 자리’에서 잘 드러난다.) 이 때 의자 위로 씌워지는 창살 같은 창틀 조명은 그 자리를 부여받은 누군가에게 ‘저항하지 말고 너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라’고 말하는 개인 외부의 속박이 작용하는 느낌을 준다. 동시에 ‘내 학교에서의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한 개인 내부의 마음가짐이 스스로를 옥죄는 양상을 표현하기도 하는 듯하다. 이 조명은 도냐 페피따가 자유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엄격한 규율을 이야기하는 ‘M-04. 철의 정신’ 넘버에서 도냐 페피따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규율 안에 '우린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 의미심장하다. 창틀 조명의 이동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 넘어선 소망을 갖지 않도록 학생들을 회유하거나 속박하는 주된 인물이 도냐 페피따라는 것이 단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학교를 소개하는 도냐 페피따의 자신감 넘치는 말과는 상반되게 동시에 그의 동선에 따라 움직이는 창틀 조명이 의미하는 속박은 도냐 페피따와 학교 규율의의 모순을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모든 경계선들이 다른 소품이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무대장치가 아닌 조명 ‘빛’으로 구현된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점이다. 이그나시오와 학생들이 말하길, 이들이 시력이 없으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빛’이며, 계속 갈망하는 것도 ‘빛’이다. 빛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은 이러한  학교 안과 밖의 경계선이 없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진실을 볼 수 있게끔 하는 시력이 결여됨에 따라 인식 하지 못하는 것일 뿐,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이 시력이 없다는 사실을 지운 채 살아감으로써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차단한다. 이는 학생들의 낙관주의가 눈 먼 것과 똑같다는 미겔린의 대사와도 이어진다. 자신들에게 불편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낙관적 사고방식은 그 불편함과 그를 발생시키는 문제상황을 인지할 기회를 앗아간다. 하지만 학생들이 이그나시오에 의해 ‘앞을 보는 것’ 대한 열망과 가지게 된다면, 그렇게 그들이 보지 못하는 ‘빛’이 있다는 고통스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빛으로 된 경계선과 불평등의 존재를 선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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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공연사진 ⓒ뉴프로덕션

 

 

 

색채의 사용과 시력의 한계


 

작품의 조명과 의상의 색채 사용도 뛰어나다. 이그나시오가 처음 등장할 때 무대 테두리와 계단에 파란색으로 빛나던 직선의 조명들은 도냐 페피따의 등장에 빨간색으로 변한다. 이는 상반되는 색채를 통해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인물의 입장을 표현한다. 하지만 후에 ‘앞을 보고 싶다’는 이그나시오의 주장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데 있어 빨간색 조명을 사용하며 극은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분을 부순다.

 

‘빨간색’의 사용은 ‘타오른다’는 것과 이어지기도 한다. 도냐 페피따의 등장과 함께 밝혀진 빨간 조명은 미겔린이 이그나시오에게 동화되어 앞을 보는 것을 갈망하면서 ‘내 안은 불타오른다’고 말할 때 다시금 붉게 비춰진다.(M-10. 앞을 보는 것) ‘타오른다’는 상태는 작품에 있어서 중심적인 컨셉이다. 일차적으로 작품의 제목 역시도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이다. 겉보기엔 상당히 모순적인 제목이다. 타오른다는 것은 빛을 발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목은 빛은 소거된 상태로 타는 듯한 고통과 열기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하기도 하고, 또는 불의 연료로써 타오르는 대상을 어둠으로 설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둠을 불태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극 중 붉은 조명은 어둠을 불태우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도냐 페피따는 학생들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즉 학생들의 어둠을 연료 삼아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며, 진실을 밝힐 빛을 자신이 독점하려는 인물이다. 그녀는 ‘빛’을 가지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인물이 자신뿐임을 강조하며, 자신이 말하는 것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실임을 주장하기에 권력을 가진다. 그리고 학생들을 불길이 지나간 차갑고 새카만 잿더미같은 폐허 속에 남겨놓는 것이다. 반면, 이그나시오는 그들이 마주한 어둠을 연료로 불태워 학생들 모두의 빛을 밝히려는 인물이다. 불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도냐 페피따는 아이들의 어둠을 연료로 이용하고 있는 대신 그 불길이 자신을 향할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며 자신에게 반발하는 학생을 예민하게 경계할 수 밖에 없다. 시력이 없는 학생들에게 어둠은 늘 익숙하게 함께해 온, 삶의 일부이다. 빛을 밝히기 위해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일부를 끄집어내어 그 위에 불을 붙인다는 것은 타오르는 고통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불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그 연료가 되는 어둠은 점점 소멸 될 것이며 빛의 세계가 가까워 올 것이다. 붉은 조명의 사용은 관객으로 하여금 ‘타오른다’는 강렬한 상태를 쉽게 감각할 수 있도록 하고, 불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손에 있으며, 어떤 의미의 타오름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생각하며 극을 따라오게 한다.

 

그리고 빨강과 파랑을 섞은 색인 보라색은 작품 내내 등장하며 작품의 중심적인 색채가 된다. 이그나시오의 주장에 흔들린 학생들이 도냐 페피따의 명령에 다시 규율을 암기하는 장면(M-11c. 철의 정신 rep.)에서 조명은 보라색으로 빛나는데, 이는 도냐 페피따의 입장 아래에 있던 학생들이 이그나시오의 영향을 받아 생각의 혼재를 겪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근본적으로 이그나시오가 등장하기 전부터 모든 학생들의 교복은 보라색이다.

 

도냐 페피따와 까를로스의 지도 아래 독점적인 하나의 의견만을 따르며 이그나시오의 주장과 일치하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해 왔을 뿐, 두 가지 입장, 안정과 저항에 대한 욕망은 인물들 안에 애초부터 공존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1막 초반부에 까를로스가 학교 바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은 쇼핑몰, 축구장, 식당 같은 학교 밖의 일상들을 들으며 궁금해하고 부러워하는 반응을 보인다. 학교 바깥의 시력이 있는 사람들과 같은 것들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표현되는 것이다. 다만 학생들은 학교 안의 세상을 다시금 이상화하며 자신의 욕망을 없는 것처럼 가려 놓는다. 그리고 모든 일상 생활이 익숙하고 어려움이 없는 학교 안에서는 학교 안과 밖의 차이를 실감할 일이 없으니 그렇게 그 열망을 없는 셈 치기 쉽다. 이렇게 그 자신이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인물들 안에 상반되어 보이던 입장이 혼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보라색의 색채 이미지는 어떤 열망을 더 앞세울 것인지를 ‘선택가능한’ 영역으로 드러내며 어떤 선택이 더 나은 것인지 관객에게 고민할 기회를 준다.


도냐 페피따의 경우 베이지색 양복을 입었지만, 바지 아래 가려진 구두가 보라색이고, 걸어다닐 때마다 바짓단 아래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도냐 페피따는 학생들의 세계 바깥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면서 학생들을 통제하는 것 같고, 언뜻 보기에는 둘 중 어떤 의견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립적인 진실을 바라보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학교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과 '학교에 순응하는 것', 두 가지 인식이 동시에 존재하며, 자신의 권력을 위해 두 가지를 저울질하면서 중립적이고 절적인 양 포장하는 것이다. 도냐 페피따는 학교와 학생들의 한계를 인지하기에 그를 이용해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만, 동시에 학교를 지키기 위해 충성스럽게 자신이 본 진실을 희생시킴으로써 학교가 가진 권위에 복종한다.

 

이렇게 교복과 조명에서는 빨강과 파랑, 보라색 등의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비되게, 1부에서 언급된 것처럼 무대는 온통 검은색이다. 파장의 차이로 사물의 색채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빛’이다. 이는 극의 시작 부분, 온통 검은색인 무대 위 나무에 초록색 조명이 입혀지며 초록색 잎이 표현되는 연출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온통 검은색인 무대는 ‘어둠’에 대한 직관적인 이미지이기도 하겠지만, 세상의 윤곽은 느낄 수 있어도 ‘만물의 색채’를 보지 못하는 학생들의 시각을 표현한다. 이그나시오의 말대로 학생들이 인지하는 세계는 이 세상의 ‘일부만을 알 수 있는’, ‘온전할 수 없는 세계’이다. 또한 까를로스가 학교 바깥세상에 대해 말할 때, 이그나시오와 학생들이 하늘의 ‘별들’에 대해 상상할 때,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도시의 건물들과 밤하늘의 별들은 무대 뒤쪽 벽에 ‘점자’를 표기하는 여섯 개의 점들로 형상화된다. 이는 학생들이 점자라는 언어로, 촉각을 통해 느끼는 세상을 정안인 관객을 위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색채가 사라진 검은 무대는 이는 극의 초반부, 중반부에 아카펠라에 맞춰 무대 공간 하나하나가 드러나는 것과 맞물려 극장의 관객들이 무대 위 인물들의 시각을 공유하게끔 한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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