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함께이기에 아름다운 사랑의 나날들 - 뮤지컬 <렌트> [공연]

글 입력 2024.03.07 15:0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무언가에 ‘인생’ 자를 붙이는 게 어렵다. 남들은 주저없이 이야기하는 인생 영화, 인생 드라마, 인생 음악에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래도 누군가 나에게 ‘인생 영화’를 물어보면 뮤지컬 영화 <렌트>를 꼽곤 했다. ‘인생’ 자를 붙일 만큼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건 아니지만, 심심할 때마다 이미 다 아는 넘버를 흥얼거리며 반복해서 봤다.

 

이 영화는 뉴욕 빈민가에서 그럴듯한 미래 계획 하나 없이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가는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다. 마약, 에이즈, 동성애 등 다소 파격적으로 보이는 소재들도 이 영화를 소개하는 데 빠질 수 없다. 드랙퀸인 엔젤이 처음 등장하는 넘버인 Today 4 U와 댄서로 활동하는 미미가 ‘캣스크래치 클럽’에서 노래하는 Out Tonight을 보면 흥겨운 멜로디와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전달돼 절로 신이 났고, 콜린과 엔젤이 서로 사랑에 빠져 부르는 I’ll cover you는 서로를 향한 그들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 흐뭇해졌다. 에이즈 환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위로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나, 뿔뿔이 흩어졌던 친구들이 다시 모여 마크가 만든 영상을 함께 감상하며 서로를 추억하는 장면에선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뉴욕 빈민가에서 사회가 정한 규칙을 마음껏 깨부수며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서로 상처 주고, 화해하고, 다시 모여 서로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예술가들의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1년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우리네 인생이 떠올랐다. 함께일 때 무엇도 두렵지 않은 그들은 넘치는 에너지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친구들과 추억을 쌓고, 또 마음껏 사랑에 빠지지만 미숙함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지고, 서로를 증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들은 함께일 때 반짝였던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사랑으로, 애정으로 관계의 틈을 메워낸다. 그 시간을 거치며 그들은 인간과 세상, 관계를 이해하며 성장해 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이들은 크고 작은, 때로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겪는다.

 

만남부터, 함께일 수 있어 더 빛났던 시간들을 거쳐, 이별을 겪고, 상실과 그리움을 느끼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러나 결국에는 사랑으로 그 모든 것들을 봉합해 내며 한 발 더 성장해 나가는 이 모든 과정이 우리의 삶과 같다. 그래서 누군가 ‘인생’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이상하게 렌트부터 생각이 난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미친 짓들을 위해 미쳐갈 때 건배할 수 있는 청춘



렌트 내부이미지(1).jpg

 

 

내 인생 영화 원작은 사실 뮤지컬이다. 뮤지컬 렌트가 3년 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이 얼마나 기뻤던지. 바쁜 일정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뮤지컬을 보러 갔다. 화면 너머로 느낄 수 없는, 현장의 열기와 에너지가 한껏 느껴졌다. 예술가들의 젊음과 열정,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떠한 장벽도 없이, 온전히 느껴지는 그들의 에너지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나도 모르게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많은 배우들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공연장을 가득 채워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고 ‘집세를 내지 않겠다’며 노래를 부른다. 세상 모든 건 다 빌려쓰는 거라면서. 자기 삶의 노래를 찾겠다며 괴로움에 울부짖는 로저와, 우연한 기회에 큰돈을 벌어 기쁜 마음에 친구들 앞에서 춤을 춰 보이는 드러머 엔젤. 펍에서 한때 친구였지만 이제는 ‘기득권 꼰대’가 된 베니와 그의 동료들을 야유하며 춤과 다소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술가들. 모든 넘버들이 젊은 예술가들의 에너지를 보여줬다. 그들은 늘 열정적으로 수많은 ‘미친 짓’들을 감행했고, 서로 사랑했고, 미워했으며, 괴로워했고, 방황했다.

 

그런데 1막이 끝나고 공연장을 잠시 나왔을 때, ‘정신없고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관객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하긴, 이 뮤지컬은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어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뛰쳐나와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해 대기 바쁘다. 관객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법도 하다. 그분이 말씀하셨던 ‘정신없다’는 말이 제격이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됐다.

 

하지만 나는 그 ‘정신없음’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정한 규칙이나 규범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 오늘만을 생각하는(no day but today) 젊은 예술가들이다. 그들이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정제돼 있지 못한, ‘날 것’ 그 자체다. 이들의 현실은 그들을 옭아맬 수 없고, 그들은 때로 굉장히 무모하다. 그러나 동시에 주눅 들지 않는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긴 와중에도 자신들이 썼던 작품 시나리오와 악보를 난로에 태우며 겨울을 버티고, 집주인이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그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거대한 통으로 자물쇠를 부수어 버리는 이들이니까.

 

사랑을 할 때도 서툴지만 열정적이다. 사랑에 서툴지만 사랑한다는 감정만큼은 진실이기에, 미숙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더라도 다시 사랑에 빠질 무모함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남아있다. 비록 그들의 무모함과 서툶, 세상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과 반항심, 그리고 무언가를 표현하는 정제돼 있지 못한 날것의 방식이 보는 이들을 정신없게 하지만, 그들이 지닌 당당함과 용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과 계속해서 새로움에 도전하는 이들의 모습이 무언가에 때 묻지 않은 젊음과 청춘의 모습 같아서 나는 이상하게도 아름다움을 느꼈다. 저들의 모든 실수와 무모와 도전과 반항이 아름답다고.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저런 정신없는 시절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겪어내고, 또 겪어보지 않았을까, 하고.


 

렌트 내부이미지(3).jpg

 

 

 

이 세상에 어디를 간 데도 분명히 뉴욕보단 살만할 거야


 

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렌트는 당시 미국 사회의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길거리 곳곳에 가득한 노숙자들과, 횡행하는 마약과 에이즈, 돈이면 다 되는 물질주의 등 오랜 시간 동안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모순과 폐해를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노숙자와 마약중독자가 즐비한 거리에 마약 상인이 실수로 뿌린 마약을 보고, ‘흰 눈이 내린다, 흰 눈이 내려온다’며 크리스마스를 표현한다. 등장인물인 미미 역시 한때 마약중독자였다. 미미와 거래했던 마약상인은 그에게 끈질기게 마약을 권유하고 마약을 끊고자 했던 미미는 다시 마약에 손을 대고 만다.

 

과거 예술가 동료였지만 부잣집 딸과 결혼해 친구들을 떠나게 된 베니는 공터에 예술인들을 위한 스튜디오를 만드는 재개발을 하겠다며 친구들을 회유하지만, 주인공 마크와 로저는 공터에 있는 노숙인들을 모두 내쫓겠냐는 것이냐며 화를 낸다. 모린 역시 자신의 공연에서 베니를 부자들의 ‘감시견’이라 조롱하며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곳, 즉 돈을 벌기 위해 재개발을 하고, 돈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내쫓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며, 저 달 너머로 가자(over the moon)고 노래한다. 모린은 자신에게 달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 젖소가 나왔던 꿈을 이야기하며 ‘음매~’라고 외친다. 이때 관객들 모두 모린과 함께 ‘음매~’하고 소리치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관객들, 무대 위 모린과 하나 되는 느낌이었다. 재개발, 법, 제도 등 사람들을 억압하고 옭아매는 온갖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듯했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렌트 내부이미지(2(.jpg

 

 

노숙인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경찰의 모습에 영화감독을 꿈꾸는 마크는 자신의 무기인 카메라를 들이밀어 경찰들을 돌려보내지만, 노숙인은 마크에게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며 도리어 화를 내고 ‘예술가 양반, 돈 좀 있슈?’라며 마크에게 자신이 구걸한 돈을 모아놓은 통을 들이민다. 나름의 정의를 위해 행동한 가난한 청년 예술가는 자신이 구한 노숙인에게 줄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에 작아지고 만다. 이 모든 광경을 본 콜린과 엔젤이 ‘거지 같은 뉴욕’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에 어디를 간 데도 분명히 뉴욕보다는 살 만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며. 콜린은 노숙인과 마약중독자, 에이즈가 만연하고 물질주의로 물든 ‘때 묻고 낡은 도시’를 떠나 산타페에서 레스토랑을 열자고 노래한다.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 콜린은 ‘철학 말고 와인을 이야기’하고, 드러머인 엔젤의 ‘드럼 비트에 맞춰, 손님들을 앉히’고 싶다며.

 

에이즈 역시 뮤지컬 렌트의 주된 소재다. 주요 등장인물 절반 가까이가 이미 에이즈 보균자이며, 에이즈 환자를 위한 모임인 ‘삶의 빛’ 모임이 뮤지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삶의 빛 모임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악화되는 상황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공포를 느끼지만 서로 손을 잡고 이 아픔을 함께 헤쳐 나가자고 노래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껏 울고 웃는다. 그러나 결국 삶의 빛 모임의 환자들은 한 명 한 명 그 자리를 떠나간다.

 

보헤미안의 자유로움을 담은 넘버 ‘La Vie Boheme’에서 뉴욕의 예술가들은 수많은 예술가의 이름을 열거하고, 소위 ‘꼰대’들이 질색할 법한 수많은 성적인 농담과 제스처를 취하며 깔깔대지만, 마지막엔 한데 모여 ‘진짜 현실, 에이즈를 물리쳐라!’라고 외친다. 이들에게 지금 당장 심각하게 논의되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본인과 친구들의 몸과 인생을 좀먹고 있는 에이즈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2막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버린 로저와 마크는 그들이 그토록 끔찍하게 여긴 뉴욕에서 재회한다. ‘정말 죽여주는’ 아메리카에서 ‘밀레니얼의 끝자락’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영혼을 채우려고 하지마, 그저 주머니만 채우면 되는 곳이야’라고 노래한다. 돈이면 뭐든지 다 되는 세상, 돈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체념이다. 하지만 이 넘버에서 마크는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락한 한 방송사의 PD 자리를 내쳐버리며 가사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 자신은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통보하며 말이다.


 

 

삶은 사랑의 나날들이기 때문에


 

렌트 내부이미지(4).jpg

 

 

뮤지컬에선 뉴욕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고, 등장인물들의 삶도 어떻게 보나 나아지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렌트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는 뮤지컬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넘버, ‘seasons of love’다.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로 시작하는 그 넘버다. 암울한 배경과 자조적인 가사들이 즐비하고, 영영 되찾을 수 없는 이별을 이야기한다 해도 이 뮤지컬은 결국 ‘사랑’을 말한다. 이들은 ‘seasons of love’를 부르며 자신들이 만나고, 온갖 미친 짓들을 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다시 재회했던 그 엄청난 1년,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시간을 ‘사랑의 나날들’이었다고 전한다.

 

등장인물들 저마다 사랑의 형태는 달랐을지라도, 그들은 모두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했다. 에이즈로 떠나간 친구의 장례식에서도 이들은 슬퍼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기보다 그가 자신에게, 또 세상에 남겼던 빛과 반짝임을 이야기한다. 친구가 남겼던 모든 기억을 추억하며, 그를 진정으로 ‘애’도한다.

 

1년이라는 시간,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시간 동안 그들은 방황했지만 결국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마크가 제작한 지난 1년간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함께 바라보는 장면으로, 이들의 1년을 담아낸 뮤지컬 렌트는 끝이 난다.

 

결국 3시간 동안 정신없이 펼쳐진 모든 이야기들과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들이 - 서로 웃긴 말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리고, 서로를 위하며 연대했고,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그만큼 증오했던,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줬던, 그리고 또 누군가를 떠나보냈던 - 결국 서로를 사랑했기에 존재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랑에 용기가 필요함을 느끼는 순간이 많다.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부터 상대에게 꾸밈없는 나를 솔직히 드러내 보이는 일, 끊임없이 상처받고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과 ‘이별’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주저없이 사랑에 빠져 그 사람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은 두렵고, 불안하며 한편으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사랑을 하며 행복하고 충만했던 그때의 나와, 그 사람이 나에게 준 추억은 그 사람이 내 삶에서 떠나갈지라도 나의 기억 한편에서 영원히 빛난다. 주저없이 사랑에 빠지기로 선택한 이들의 무모한 이야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 보인다.

 

 

[한수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