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식물-되기’의 문학적 상상력 - 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 [도서]

글 입력 2024.02.2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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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되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구애하는 남성(신)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를 택한 다프네가 있다.

 

폭력에 반하여 ‘식물-되기’를 택한 서사는 문학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한국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예로 한강의 소설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부터 김초엽의 「므레모사」까지가 떠오른다. 이제 ‘식물-되기’의 문학적 상상력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2024년, ‘나무-되기’를 바라는 인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수마나 로이의 에세이 『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How I Became A Tree)가 국내에 번역되었다. 왜 ‘식물-되기’는 여전히 유효한 상상력일까? 혹은 더 근본적으로 묻자면, 왜 하필 식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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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나무는 장애인이다. 땅에 뿌리내려 움직이지 못하는 운명을 한탄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나무를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John Muir, John of the Mountains: The Unpublished Journals of John Muir, 1938.)

 

<2> 새벽이 되면 나는 알 수 있었다. 고요와 적막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깊은 밤이 되면, 바로 이곳이야말로 내가 궁극적으로 머물러야 할 자리라는 걸. 흔들림도 뒤척임도 없는 부동의 장소, 움직임이 없는 몸. 모든 것이 멈춰 선 몸.

그 몸 안에서 나는 고통도 괴로움도 없이 자유로웠다. (김초엽, 『므레모사』, 2021, p. 172)

 

<1>은 1980년대 자연주의 작가 존 뮤어를 인용한 수마나 로이의 문장을 재인용한 것이고, <2>는 『므레모사』에서 다리 하나를 사고로 잃은 주인공이 자기 욕망이 ‘나무’가 되는 것이라고 깨달은 문장이다. 이들이 공통으로 주목하는 식물의 특징은 ‘부동’이다.

 

특히 <2>의 경우는 <1>에서 더 나아가 주인공이 이전까지의 ‘움직이던’ 일상을 부정하고 오히려 부동의 몸을 반기고 동화하면서 ‘움직이는’ 동물이기를 저항한다.

 

수마나 로이 역시 “움직여야 살아있는 것이라는 관점은 대단히 배타적”(18)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 배타적인 관점에 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으로 ‘식물-되기’를 제안한다. 여기서 ‘-되기’란 필자가 언급했듯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되기’(becoming)의 개념일 것이다. 다만,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되기’, 특히 ‘동물-되기’ 그 대상에 도달할 수 없고 단독자로 구성될 수 없다. 그 대안으로 작가는 ‘식물-되기’를 제안한다.

 

 

“아무리 이상하게 생긴 나무라도 그 그림자는 언제나 편안하고 익숙하다. 나무 그늘에는 낯선 특징도 보이지 않고 나무껍질이나 잎, 꽃, 열매의 색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인종, 계급, 종교와 관계없이 똑같은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p. 112)

 

 

여기서 ‘식물-되기’의 상상력은 동물의 무리나 떼와 같은 특성이 아닌, 어떤 무리 속에서 자신을 평가하지 않으며 자신이 홀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수마나 로이는 <나무로 변신한 여자들>에서 여성과 식물을 연결한다. 그는 로렌스의 시 <무화과>를 읽으며 여성성의 해방을 느꼈다. 뒤이어 그리스 신화의 다프네와 페르세포네를 통해 폭력의 피해자가 된 여성 서사와 실제 여성 대상 범죄를 언급한다.

 

즉, 수마나 로이에게 여성이 식물로 ‘변신’하는 서사는 우연이 아니다. 이야기에서 여성은 무리에서 피해자가 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식물로 변신한다. 그리고 식물 중에서도 가장 ‘부동’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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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나의 관계를 나무와 빛의 관계처럼 상상해보기도 했고, 속도와 과잉을 거부하고 나무의 시간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완전히 나무 같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p. 348)

 

 

그러나 ‘-되기’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우리가 식물이 될 수는 없다. 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이다. 다만, 수마나 로이의 “느린 시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98)과 그 끈질긴 사유가 만들어낸 ‘식물-되기’의 문학적 상상력은 결코 헛된 시도가 아니게 되었다.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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