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운명 앞에서 발버둥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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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두 사람이 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와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쇼> 속 트루먼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 인물이지만 자신의 운명을 마주치고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파고들어간다.
트루먼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비가 자기에게만 떨어지고,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있는 걸 목격한다. 나만 모르는 무언가 있는 게 아닐까.
오이디푸스는 고요히 앉아 타인에게 질문하며 끝없는 심연 속 자기자신을 찾아간다. 첫 질문상대는 이오카스테였다. 이어서 갓난아이일 적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목동,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내린 예언가에게도. 오이디푸스는 질문을 통해 끝없이 사건의 전말을 찾아간다. 그는 스핑크스를 물리쳤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다. 오이디푸스는 질문의 과정에서 자신이 시해범임을 몰랐을 리 없다.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가 더 이상 파고들지 말라고 그를 말려도 오이디푸스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알게 된다면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나아가, 결국 진실에 다다르게 된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기에, 시해범을 찾아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책임감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책임,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이 가진, 자기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갈망과 욕망 자체가 그를 멈추지 않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트루먼은 몸으로 세상에 부딪혀가며 세계의 진실한 모습을 찾으려 한다. 아내를 태우고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 미친듯이 차를 운전하며, 이 세상은 자신이 정해지지 않은 행동을 하면 막으려고 든다는 것을 발견한다. 모든 상황, 가족, 친구가 짜여진 각본임을 알아내고,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린 시절 트루먼의 꿈은 탐험가였다. 하지만 그가 세트장을 벗어나는 걸 막으려고 방송 관계자들이 그에게 물 공포증을 심은 바람에, 트루먼은 섬을 둘러싼 바다 바깥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두려움이 자기 안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트루먼에게는 자신의 것이 아니던 인생에서 벗어날 일만 남았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찌른다. 하지만 이것이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사랑할 것이다’. 그렇다, 오이디푸스는 주어진 운명은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눈을 파낼 거라는 건 예언에 없었다. 온전히 그의 선택이다. 자신을 알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해나간 것도 그의 선택이고 자유의지였다. 그의 인생은 운명에서 시작됐지만, 그의 선택으로 끝난다.
트루먼은 세계, 즉 세트장의 끝에 다다른다. 출구 앞에 서서,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책임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그가 주인공이었던 TV쇼에서 퇴장한다. 그렇게 트루먼은 운명에서 벗어난다.
[오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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