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다보니 폭우에도 젖지 않는 세련됨이 필요합니다 - 이런 밤, 들 가운데서

글 입력 2023.12.14 18:3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당신을 사랑했지만 더는 사랑하지 못하고

우리는 이별했지요

당신을 사랑할 적에 나는 얼마나 담대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담대한 사랑을 했지요 나는 아마도 우리는

그 후로

폭우가 쏟아지던 날에 지리산 계곡 맡에 텐트를 치고 지낸 일이 있습니다

첫날에는 물이 무섭게 불어나 계곡은 구경만 겨우 했습니다

폭우는 담대하게

바람이 너무 불어 텐트를 붙들고 잤습니다

물소리가 너무 커 귀가 다 멍멍했습니다

텐트와 계곡 사이에는 울타리가 쳐져있는데

울타리 아래에는 독버섯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버섯을 잘 알지 못해도 독버섯은

우리가 독버섯이라 부르는 것들은 알 수 있습니다

내동댕이쳐진 것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에 있는지 찾을 때가 있습니다

살다보니 폭우에도 젖지 않는 세련됨이 필요합니다

나의 텐트는 인터넷 최저가 가성비 입문용

비가 새고 바람에 나부낍니니다 펄럭펄럭 태극기처럼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현현하게

당신을 사랑할 적에 나는 얼마나 담대했는지

이제는 정말로 모릅니다

 

- 계곡의 안부

 

 

*

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KakaoTalk_20231214_172428736_04.jpg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당신의 안부를 끊임없이 묻고 살피는 연극 [이런 밤, 들 가운데서]가 2023년 11월 21일부터 12월 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 111에서 상연되었다.


2021년 제 12회 두산연강예술상 공연부문 수상자 설유진 연출의 신작인 이번 공연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시선을 여과없이 담아냈다.


 

KakaoTalk_20231214_172428736_05.jpg

 


공연은 원형의 무대로 구성하여 배우와 배우끼리, 그리고 관객과 배우끼리, 관객과 관객끼리 얼굴을 마주하고 시선을 부딪힐 수 있도록 유도한다. 좌석에 앉는 그 순간부터,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고 교류하게 된다. 나와 너, 우리, 그리고 나아가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담아낸 공연에 있어서 이러한 연출은 환상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다고 느꼈다. 배우와 관객이 모두 극에 ‘들어와’ 있었다.

 

본래의 무대 구성은 일반적인 공연 형태와 같이 배우들은 단상에 위치하고, 무대 아래에서 관객들이 단상 위 배우들의 연기를 관람하는 일직선 구도였다.

 

그러나 모닥불 주위에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내고자 연출 구체화 과정에서 파격적인 무대 디자인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KakaoTalk_20231214_172428736_03.jpg

 


옥자연 배우는 ‘관객과의 대화’ 세션에서 원형 무대로 바뀌게 되자, 지루해하는 관객들의 얼굴까지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한 점까지 배우로서 너무나 인상 깊은 장면으로 자리 잡았고 좋아하게 되었다고 인터뷰 했다.

 

또한 이 공연은 라디오 주파수 같다고 말하며, 공연에서 담아내는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전해지고, 듣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노이즈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며, 이를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생경한 감각이 배우로서 오히려 더 극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내면의 강함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관객 뿐 아니라 배우에게도 내면의 강함을 갖게 해준 연극 [이런 밤, 들 가운데서], 어떤 공연이었을까.


*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

 

뻐꾸기 시계처럼 늘 같은 시간에 나와 우편함을 뒤지는 맞은 편 건물 할머니와 지하철 승강장에 기대 숨죽여 우는 사람. 사랑과 이별, 자유. 그리고 손 쓸 새 없이 겪게 돼 버린 참사와 그로 인한 깊은 상흔들.


[이런 밤, 들 가운데서]은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담았다. 참사를 지나는 마음과 동시대 공연예술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더 큰 우리’가 함께 듣고 볼 수 있는 속도와 질감을 찾아가는 공연이다. 작품에는 ‘자유와 사랑이 도망간 세상에 그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염원이 담겨있다.

 

 

 

"참으로 담대한 사랑을 했지요 나는 아마도 우리는"


 

공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승자와 소란이다.

 

이들은 운명처럼 횡단보도에서 만났다. 여느 연인과 같이 아주 절절하기도, 식어버리기도 한다. 보통의 사랑이다.

 

승자는 소란과 함께 간 재즈바에서 소란이 트럼펫 연주자에게 반했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리곤 이 사실을 쉽게 말하지 못 하다가, 터뜨린다. ‘쪽팔리니까’ 말하지 못 했던 말. 폭우에도 젖지 않는 세련됨을 가진 연주자와는 달리 바람에 나부끼는 인터넷 최저가 입문용 텐트를 붙잡는 <계곡의 안부> 화자와 같은 ‘승자’. 세련된 그 사람에게 반하지 않았냐고 다그치는 승자의 모습에서 나는 처절함을 읽었다. 찌질한 사랑이었지만, 처절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절로 감정 이입되었다.

 

어쩐지 매력적인 그 사람에게 눈길을 준 소란이 미워지기도 했다. 왜 사랑은 쉽게 헐거워질까. 이런 마음이 불쑥 튀어올랐다. 이들이 결국 헐겁게 헤어져서였을까.

 

연극은 소란의 메일로 시작한다.

 

계간지 [자유와 사랑]의 자유기고 코너 ‘21세기의 시’에서 오자를 발견한 소란은 담당자에게 이를 알리는 메일을 작성한다. '나에게 랑사이 그랬고, 너에게 애정이 그랬다'에서 ‘랑사’는 ‘사랑’을 반대로 쓴 것 같다는 것.

 

처음 극이 시작했을 때는 단순히 소란이 시를 좋아하는 애독가인 줄로만 알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시는 ‘승자’의 글이다.

 

소란은 승자와의 이별 후에도 승자의 글을 읽는 독자이고, 그의 활자에서 여전히 ‘우리’를 더듬고 있다. 사랑은 왜 쉽게 헐거워질까라는 마음이 들기가 무섭게, 공연의 끝자락에서 이 물음은 내쳐진다. 처음 소란의 메일 속 시가 전 연인 승자의 글이었다는 점을 관객들은 알지 못하지만, 공연 끝자락에서 시인의 정체가 밝혀진다. 전략적으로 구성한 공연의 흐름을 따라가며 감탄했다.

 

세련된 것에 집착하며 찌질한 사랑의 역사를 써내려간 승자도, 그런 승자에게 지쳤지만 여전히 승자의 활자를 더듬고 있는 소란도 모두 ‘사랑’ 하고 있는 사람의 현현이라 더욱 몰입되었다.

 

승자가 ‘랑사이’라고 적은 이유를 ‘사랑이’라고 적으면 너무 마음이 아파서이지 않을까요, 라고 연출가는 답한다. ‘사랑’이라는 활자만로도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사랑은 왜 쉽게 헐거워지니- 란 물음은 더이상 무용했다.

 

승자와 소란의 사랑이 단순히 에피소드이지만, 이 공연은 계속해서 ‘사랑’의 원형을 끌고 간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위로와 애도를 건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여기서 ‘사랑’을 볼 수 있었다.

 

 

KakaoTalk_20231214_172428736_01.jpg

 

 

앞서 말했듯, 공연에서는 뻐꾸기 시계처럼 늘 같은 시간에 나와 우편함을 뒤지는 맞은 편 건물 할머니에게 찾아가 수박을 건네는 에피소드와 지하철 승강장에 기대 숨죽여 우는 사람에 대한 에피소드도 다루어진다. 서울동물원의 자랑인 앵무새 ‘사랑이’ 와 뻐꾸기 ‘자유’가 현실에서는 총에 맞아 죽지만, 환상의 시공간 속에서 ‘사랑이’와 ‘자유’는 살아 숲으로 돌아가는 에피소드도 담겨있다.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 자유와 사랑이 무너진 세상에서 ‘자유’와 ‘사랑’을 다시금 찾아내는 연출을 보며 사랑과 위로의 감각이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연 밖에서도 섬세하고 다정한 시선은 이어졌다.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공연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단언컨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연예술에 대한 고민과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잘 담아내기 위한 세심한 관찰이 매우 잘 드러났으니 말이다.

 

 

KakaoTalk_20231214_172428736_06.jpg

 

 

연극 시작 전 배우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비상구를 안내한다. 이후 연극이 시작되고나서는 배역 이름과 함께 자신은 어떤 캐릭터인지 말하는 것으로 극을 연다. 특이했던 점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 말총머리, 루즈한 핏의 갈색 바지, 검정 단화 등 외양을 상세히 기술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자세하게 외양을 말한 것은 ‘배리어컨셔스(Barrier-Conscious)’ 작업의 일환인데, 연출가는 '관객과의 대화' 세션에서 시각 장애인도 캐릭터의 외양을 상상하고 극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해당 대사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무대 상단에는 대사 한 줄씩 자막 형태로 띄워지는 스크린이 있었는데, 이 역시 청각 장애인도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배리어 컨셔스 작업을 한 것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공연을 보며, 장벽을 어떻게 허물 수 있을지 고민한 점이 여실히 느껴졌다.

 

공연 [이런 밤, 들 가운데서]는 ‘자유와 사랑이 도망간 세상에 그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졌고, 이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찾아낼 것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과 위로, 애도를 담아낸 이 공연이 바로 승자가 말한 ‘폭우에도 젖지 않는 세련됨’ 아닐까.

 

 

[권수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