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천개의 파랑'을 읽고 [도서]

우리도 '천개의 파랑' 하늘만큼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길.
글 입력 2023.12.14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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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러한 장르를 '약한 SF'라고, 나름의 언어로 정의하는데 판타지나 무협지처럼 대부분 혹은 많은 플롯이 픽션인 것이 아닌 몇 가지, 때론 한 가지의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소설을 말한다.

  

이런 장르일 수록 유일하게 설정된 그 판타지적 요소가 우리의 세상을 오히려 바깥에서 뚜렷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받는다. 오히려 현실적 구성의 소설보다도 때로는 더 면밀히, 세상을 관조하며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움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노랫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야흐로 상실의 시대다. 나 역시 한때는 이별과 내 주위의 관계 변화에 대해 힘들어하고 탓했던 시간이 길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행복해지는 것만이 그 시절을 놓친 회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란 말이 내겐 크게 와닿았다.

  

불교의 교리인 유식 심리학에서 석가는, 이별의 고통에 대해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은 영속할 수 없으며 이는 우리에게 고통을 유발한다고 설법한다. 고통은 고통이고, 행복마저도 결국 우리를 떠나감이 예정되었다는 점에서 생즉고(生卽苦)라는 것이다.

 

석가는 이를 화살 비유로 들어 말한다. 이별, 상실과도 같은 이러한 고통_통증(pain)은 첫 번째 화살로 이는 우리가 인생을 살며 산재해 있는 고통이다. 하지만 두 번째 화살인 고통_괴로움(suffering)은 우리가 그 첫 번째 화살을 맞음으로써 받은 통증으로부터 추가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suffering from pain'이라는 말은 있지만 'pain from suffering'이라는 말은 없듯이, 이러한 '괴로움'은 결국 통증에서 오는 것이지만, 이 두번째 화살은 고통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대신에 알지 못하고 (무명), 부정하는 데에서 온다.

 

또한, 내 몸이 자리잡고 있는 현재를 벗어나 과거나, 미래에 마음을 두게 되면 인간은 쉬이 불행해진다고 한다. 즉, 후회와 같은 감정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부정적 감정이며, 우리는 지금의 나에게 마음을 가져다 놓아야 한다.

 

책에서 말한 '그리움을 이기는 유일한 것은 행복한 순간'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행복한 순간을 통해 내 마음을 내 몸의 위치와 같게 놓고, 또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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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라는 경주마의 이름이 나에게는 일종의 메타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다른 하루를 살아가나, 이를 망각한 듯 물질적인 것들을 과시하고 겨룬다. 더 많은 돈, 더 나은 학교. 직장...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님을 이 책은 주장한다. 나만 달릴 수 있는 나의 주로에서 각자의 페이스에 맞추는 것, 그렇게 '오늘'을 기어이 한 번 더 살아내고, 버텨내는 것. 그것이 중요함을 이 책은 역설한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강조한다. 이 책은 '달리기'라는 키워드를 선택한다. 연재는 체육대회에서 달리기를 통해 자신에게 억압된 많은 시선으로 점철된 트랙에서 탈출한다.

 

책의 모두는 달리는 삶을 꿈꾸며, 연재도 언니를 달리게 하는 장치를 만들지만 책에서도 언급했듯 '달리는'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다리는 그저 형체일 뿐이다. 중요한건 자유로움이다. 다리가 아닌, 그 다리로 한껏 뜀박질해 나를 억압한 주로를 벗어날 수도, 나만의 궤도를 찾고 달릴 수도 있는 그 자유로움이다. 천개의 파랑 하늘을 담는 마음으로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하는 바로 그 자유로움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다.

 

부조리한 세태는 작중의 연재와 은혜를, 콜리와 투데이를, 또 민주와 보경을 덮치듯 우리 모두를 덮친다. 이런 부조리한 세태는 빠른 발 따위로 쉬이 극복할 수 있는 파도가 아니다. 나를 옥죄는 이 부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책은 대답을 제시한다. 내가 꼴찌를 할 것을 알더라도 웃으며 다시 트랙에 설 수 있는 용기, 청새치를 들고 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투를 벌인 노인의 용기, 돌을 밀어 올리며 웃어 보이는 시시포스의 용기로만 극복할 수 있다. 천천히라도, 다른 길일지라도 또다시 '달리는' 용기로만 반항할 수 있다.

 

폐품이건 고물이건, 남들이 부르는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네가 나를 폐품 취급해도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회가 닿는 한 나는 그 트랙 위에 다시금 서 있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이고, 그것만이 내가 기수로서, 인간으로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고 인간성의 저력이다.

 

*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시 '달린다'.

 

가족애적 결핍을 겪은 연재도, 은혜도, 기수 로봇 콜리도, 경주마 투데이도. '꼴지를 하는 경주마의 경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전부 이겨낸 채로 본질을 회복해 낸다.

 

로봇 콜리는 작품 내내 감정이 없음이 강조된다. 로봇이니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허나 마지막 경주에서의 '내게 두려움이 없고 미련이 없다. 오로지 말을 살려야 하고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존재의 이유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통해 그 역시 삶의 이유에 대해 고찰하는 인간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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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콜리는 부품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는다.

 

작품 초입, 콜리의 시점에서 묘사된 3초간의 낙하는 인간성 회복을 시사하는, 로봇 콜리의 '유통기한'이 아닌 인간 콜리의 '생애' 3초였다.

 

이러한 모든 흐름 아래, '어차피 이 주로는 투데이만 달릴 수 있다'라는 콜리의 독백은 나에게 이렇게 느껴졌다.

 

너에게 예비된 인생의 길은 네가, 오늘만 달릴 수 있다. 그곳에서 빠르건 느리건, 타인이 제한한 경주마의 시야와, 베팅한 금액 따위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네가 살아 있으면, 그리고 또 하루를 저항하고 있으면 된 것이다.

 

우린 늘 그렇듯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너무나 쉽게 모두가 같은 주로를 달리고 있다고 착각한다. 백 년을 채 살지 못하는 주제에, 오만하게도 한때의 강함이 영원할 줄로만 알고 남을 폄하하고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아둔한 생각인가. 우리가 어리고 약할 때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언젠가 다시 약해질 것을.

 

그러니 우린 물질적인 것이나 성취를 겨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을 겨루는 것이다.

 

죽지 않는 한 시간은 영원히 흐르기에, 중요한 건 오로지 그것이다.

 

 

[김우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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