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날 나는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았다 - 코리안팝스오케스트라: 더 콘서트 37.5

글 입력 2023.11.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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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공연의 장점은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복잡한 서사가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단점은 너무 마음 편히 즐겨서 다 보고 나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데 있다. 방금 너무 행복한 경험을 했는데, 이 경험을 뭐라고 서술해야 하지? 나처럼 지나치게 언어에 천착한 인간은 이런 비언어적인 예술에 약하다. 솔직히 오케스트라 공연 리뷰 쓸 때마다 늘 이런 말로 시작하는 것 같은데, 나도 좀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리뷰 쓰는 일은 어렵고, 자신 없는 글을 쓰기 전엔 꼭 밑밥을 깔아두고 싶은데 어쩌겠는가.

 

11월 14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감상한 <코리안팝스오케스트라: 더 콘서트 37.5> 공연을 보기 시작할 때도 나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공연을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경험을 할 게 분명하지만, 영화나 연극처럼 서사를 분석하는 일은 없을 테니 분석의 강박은 내려놓고 편하게 즐기자고. 그런데 첫 번째 곡이 연주되자 내 눈앞에 거대한 영웅 서사 한 편이 펼쳐졌다. 오래전 나를 가슴 뛰게 했던 <어벤져스>의 OST를 연주한 것이다.

   

전 직장에서 나는 영화의 OST를 소개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그 기사에서는 주로 가사가 있는 사운드트랙을 다뤘었다. 그 기사를 쓰면서 나는 ‘스코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스코어란 필름 스코어의 준말로, 영화나 TV에 사용될 음악에 오케스트라를 입혀 녹음하는, 노래 가사가 붙지 않는 음악을 말한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을 통해 익숙한 영화의 스코어를 들으면서 내가 지난날에 썼던 영화 음악에 관한 글과 영화광으로서 열렬히 사랑했던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합주가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각자 본인의 악기를 연주하는 저들이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몰두하는 스태프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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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나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영화 음악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에 대한 다큐멘터리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봤었다. 내가 직장에서 영화 음악에 관한 기사를 썼을 당시 영화와 음악만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훌륭한 작곡가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한 명이 엔니오 모리꼬네였다.

 

2020년 타계하기까지 무려 60년 동안 500편의 영화에 참여하며 <시네마 천국>의 ‘Toto And Alfredo’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Cockeye’s Song’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완성한 그가 그날 공연에서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날 공연에서 나는 연주자들이 완성하는 영화에 매료되었다. 그들이 만든 영화는 한 편이 아니었다. 슈퍼히어로물로 포문을 연 그들은 영웅본색의 OST를 연주해 누아르 세계에 나를 초대하기도 했고, 국악단과 협업해 정통 사극에 나를 초대하기도 했다. 하모니카 연주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주인공의 친구가 연주하는 팬플루트가 연상되기도 했고, 숨 막히는 드럼 연주로 <위플래쉬>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이 세계 영화사 그 자체일 수 있는지 싶어 경이로웠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수많은 명작 영화가 모두 한 사람의 경력에 들어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 자체로 나를 감동하게 한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은 몇 개월 뒤, 코리안팝스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본 순간, 다시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

   

내가 전 직장에서 작성했던 영화 음악 기사는 항상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무엇일까?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바로 음악을 꼽을 것이다. 뛰어난 영화 음악은 아무리 평범한 장면이 펼쳐져도 특별한 감동을 자아낸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이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차이는 오로지 음악의 유무뿐이다.”

 

‘일상과 영화의 차이는 오로지 음악의 유무뿐’이라는 나의 믿음은 직장을 그만두고 더는 같은 기사를 쓰지 않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날 나는 코리안팝스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 덕분에 나의 평범한 일상이 영화 속 한 장면이 된 기분을 느꼈다. 나의 하루는 코리안팝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 덕에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인간의 평균 체온 36.5도에서 음악을 향한 우리의 온도로 1도 더 높여보자’라는 의미로 지어진 공연의 제목처럼 차가운 초겨울 밤공기가 왠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모든 연주자를 눈에 담기 위해 구석구석 눈길을 돌리며 관람하다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와 동시에 저자 이희인의 희곡 비평서 <자, 이제 다시 희곡을 읽을 시간>에서 접한 문장이 떠올랐다.

 

“콘트라베이스 주자는 바이올린이나 첼로, 피아노, 혹은 지휘자나 독창가수처럼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 오케스트라와도 같이 조화롭게 움직이고 흘러가는 사회의 기층과 저변을 이루는 존재들을 대표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심스럽게 끌고 가는 것도 이러한 눈에 잘 띄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이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같은 존재들이면서 스스로 얼마나 우리 자신의 존엄에 눈을 감고 사는가.”

 

오케스트라 공연을 영상으로만 접했을 때는 지휘자와 일부 연주자만 눈에 들어왔지만, 직접 현장에서 관람하니 온 힘을 다해 몰입하는 연주자 한 명 한 명에게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열정 덕에 나의 일상이 영화가 된 것처럼 열심히 일을 마친 그들의 일상도 영화가 되기를, 그 영화의 연주자 본인이 주인공이기를 바란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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